9월7일 토요일 오후 6시 청계천 광통교. 저는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16년 전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 인근 주차장에서 숙식을 하면서 생활했던 터라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었지만 두 시간 정도 일찍 와서 미리 주변을 답사했습니다. 제가 왜 그랬냐고요? 저는 좀 특이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악당에게 더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말입니다. 영화 <어벤져스>에서도 차원의 문이 열린 채 로키의 악당군단 본진이 지구에 상륙하길 고대했습니다. <퍼시픽 림>에서도 카이주들이 세상을 더 어지럽히는 장면을 보고 싶었죠. 그래서 저는 9월7일 오후 6시에 광통교에 갔던 겁니다. 마음속으로 단단히 준비를 했죠. 그날 김조광수 감독과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의 결혼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동성 결혼식. 저의 트위터 친구인 김조광수 감독이 결혼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보니 그날 날벼락이 칠 거라고 하더군요. 그뿐만 아니라 땅이 갈라지면서 하객들까지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고 하더군요.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끝내주는 4D 블록버스터영화 한편을 본다는 생각으로 축의금 봉투에 돈까지 넣어서 준비를 했지요. 약간의 혼란은 있었습니다. 처음에 신랑쪽(김조광수 대표)에 내려고 했는데 두명 모두 신랑이었던 것이죠. 축의금은 모두 성소수자센터건립을 위해서 쓰인다더군요.
5시30분 정도에 도착했는데 꽤 많은 하객이 오셨더군요. 일단 저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해뒀습니다. 땅이 갈라질 경우 어느 쪽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가. 동대문 방향이 적합할지 아니면 시청쪽이 목숨을 유지할 확률이 높을지. 또는 기존의 전통적인 징벌방법에서 벗어나 거대 카이주의 출몰 같은 창의적인 방법도 은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광통교 밑바닥이 쩍 갈라지면서 브리지가 생성되고 5등급 카이주 슬래턴이 나타나는 거죠!
6시에 결혼식이 시작됐고 공연을 포함한 식순이 진행되는 순간 저는 저의 심장 박동 수가 천천히 템포를 높이며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질 거대한 스펙터클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는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할 것인가 등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곰플레이어로 8배속 돌듯이 휙휙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그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일어났던 재앙이라곤 이들의 결혼에 반대해 두명의 남성이 난입해서 식장에 인분을 뿌린 것뿐. 기대했던 블록버스터급 재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께서 결혼식장에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분들도 계셨는데 그날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보아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너무 공사다망하셔서 ‘타인의 인격이나 행복을 전혀 침해하지 않은’ 결혼식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으셨던 게 아닐까 합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기대했던 스펙터클은 없었기에 관람료라고 생각하고 두둑하게 준비했던 축의금이 좀 아깝지만, 두분 알콩달콩 잘 사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