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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경찰, 권은희
김진혁(연출)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3-09-20

지난해 말 대선 직전 갑자기 터진 국정원 여직원 사건으로 인해 많은 언론이 여직원 오피스텔 복도에서 대기하던 때, 나는 한 인터넷 언론의 생중계를 통해 얼굴이 동그란 여자 경찰 한명을 처음 보았다.

물론 당시 현장이 난리통이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오피스텔 안에 있는 사람이 국정원 여직원인지 아닌지, 정말 댓글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여부 등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주목할 만한 이유는 없었지만, 문 앞에서 국정원 여직원과 차분히 대화하고 허둥대던 사람들에게 담담하게 브리핑을 하는 모습이 현장의 소란스러움과 대비되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저 사람 누구지?’ 하는 호기심이 들 찰나 현장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렇게 그녀는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 ‘동그란 얼굴’이 다름 아닌 권은희 수사과장이란 걸 알게 된 건 이후 그녀가 수사에 대한 부당한 외압을 폭로한 뒤였다. 언론에 소개된 그녀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그녀의 사진은 낯이 익었다. ‘맞아! 바로 저 동그란 얼굴이었어!’라고 속으로 외치며 개인적으로 무척 신기했다. 마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내 눈에 들어왔던 영화 속 한 배우가 나중에 알고 보니 대단히 유명한 배우였단 게 뒤늦게 증명되었을 때의 우쭐함이랄까? 비록 혼자만의 우쭐함이지만 어쨌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가 나온다는 청문회를 기다렸다.

청문회를 보면서 그녀가 왜 짧은 시간의 화면 노출에도 내 시선을 끌었었는지, 왜 혼란스런 현장과 이질적으로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칭찬하는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답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달라 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경찰들은 각각이 개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만은 인간 권은희가 아닌 ‘경찰’로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였다. 다른 동료들은 주로 자신에 대한 변호를 택했다면, 그녀는 자신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경찰’, 그러니까 사람들이 ‘경찰이라면 이래야 해’라고 여기는 상식과 당위로서의 경찰에 대한 변호를 택했다. 다른 동료들은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에 부합함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면, 그녀는 자신의 행위가 경찰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유지되어지는 쪽과 부합함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즉, 답변의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직업윤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경찰이란 직업도 분명 생계의 일부분이지만, 생계가 전부만은 아니라는 것 말이다. 어디 경찰만 그럴까? 다른 모든 직업이 그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먹고사니즘’에 허덕대는 요즘 세태에서 직업윤리는 허영심이나 사치처럼 취급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변호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욕하고, 권은희 수사과장을 영웅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계란 현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청문회 자리에 있던 많은 경찰들 중에서 직업윤리라는 기준에 충실했던 경찰은 한명이었고, 그 경찰의 이름은 ‘권은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