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일은 안 하면 된다. 안 해도 산다.” 무리없는 삶을 지향하는 설경구와 달리 <스파이>의 철수의 현실은 무리 막급이다. “월급쟁이 스파이” 철수에게 제임스 본드 같은 폼생폼사 스파이가 웬 말. 주어진 임무 완수하랴, 잘생긴 이중 스파이로부터 마누라 사수하랴. 그에게는 숨 돌릴 틈도 사치다. “피로도가 아주 높은 캐릭터다. 한시름 놓으려 하면 마누라가 딴 남자한테 한눈팔고 있고, 한시름 놓으려 하면 마누라가 납치됐다 그러고. 아무것도 모르는 영희(문소리)는 잘생긴 라이언(대니얼 헤니)이랑 연애도 하고 피로도 풀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스파이인 줄 알고 스릴도 만끽하는데, 그런 상황을 빤히 다 보고 있는 철수 입장에서는 진짜 똥줄 탄다니까.”
팍팍한 철수의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게 20년차 배우 설경구의 여유만만 생활연기다. 헤니의 라이언이 ‘아줌마’들의 환상을 담당한다면 그의 철수는 아줌마들의 현실을 보전한다. “<박하사탕>에서도 방금 전까지 물고문, 전기고문하던 경찰들이 나와서 마누라 얘기, 아들 얘기하며 자장면 먹는 모습이 굉장히 일상적이잖나. 스파이도 직업이 스파이일뿐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가 바가지 긁을까봐 걱정하고 애 걱정하며 살겠지. 세상에는 가식이 많은데 스파이라고 무게 잡는 게 가식 같다.” 검사, 경찰, 조폭, 프로레슬러, 감시반 반장 등 웬만한 한국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대표 직업은 다 거쳐본 그의 말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가식 없는 생활’이 곧 스파이의 ‘실제 삶’을 의미하진 않는다. “경찰 역 맡으면 경찰들 따라 현장도 쫓아다니고 그러는데, 나는 그냥 나같은 경찰도 있겠거니 하면서 연기한다. 정형화된 역할에 나를 끼워맞추는 게 싫다. 그리고 진짜 스파이가 어떻게 사는지는 어디 가서 물어보겠나? (웃음)” 그러니 스파이인 동시에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의 대명사”인 철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설경구만이 살아낸 스파이다.
“하지만 평범한 게 무서운 거야.” 그 사실을 잘 아는 설경구의 철수는 수수하고 묵묵하게 다른 배역들을 떠받쳐낸다. 아내가 눈에 씌인 콩깍지를 벗기 전까지는 모든 공을 ‘훈남’ 라이언에게 뺏길 수밖에 없고, 코믹한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기회를 종종 영희에게 내주어야 하지만, 철수는 “작정하고 웃기려는 법 없이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 탓에 관객은 처음에는 영희나 라이언에게 눈길을 뺏기기 십상이지만 뒤로 갈수록 설경구라는 배우의 태도의 미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스타일리스트 감독과 코미디에 강한 제작자의 결합이 궁금해서 시작했으나 중간에 감독이 교체된 뒤 그래도 하루하루 즐겁게 찍자는 자세로 임했다”며 솔직한 대답을 내놓는 설경구. <스파이>는 그런 그가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일구어낸 결과물이다.
그런가 하면 철수보다 웃음의 함량은 줄이고 눈물의 농도는 높인 사내 동훈도 스크린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복귀작 <소원>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 딸 소원이와 함께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아버지다. 설경구는 그를 맡아 “감정이 뒤죽박죽되면 절대 안되는 영화라 생각해 순서 촬영을 직접 부탁”했다고도 한다. “아주 정적인 영화”라는 그의 귀띔대로라면 <소원>은 “빠른 영화, 스케일이 큰 영화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져 있는” 그에게 ‘오아시스’ 같은 영화가 될 듯하다. 웬만하면 “기대하지 말고 보라”고 말하는 그의 암호문을 새롭게 풀이할 일만 남았다.
“헤니가 우리보고 그러더라. 진짜 부부 같다고.”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계에 나를 이렇게 막 대하는 여자가 딱 한명 있다며 영희 역에 문소리를 추천했다는 설경구는 <오아시스> 이후 11년 만에 다시 만난 문소리에 대해 “서로 (나이가) 들어 보이는 상태에서 (연기를) 시작해서 그런지 얼굴도 별로 안 변한 것 같다”며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자랑하는 두 사람의 궁합은 다른 배우들의 부러움마저 살 만하다. “신기하게도 소리랑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일상적이 된다. 그래서 생활연기를 해도 편하다.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툭툭 쳐도 서로 받아줄 걸 아니까, 열어놓고 갈 수 있으니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