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새 책이 나오면 새 삶이 시작되네. 원하는 사람 누구한테나 자네의 일부분을 나눠주는 거니까, 아주 이타적인 순간이기도 하고.”
조엘 디케르의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면서 주인공인 작가가 책을 써나가는 과정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화자인 마커스 골드만은 데뷔 소설이 200만부가 팔리면서 문단의 총아 겸 유명인사가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곤경에 빠지게 된다. 작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에 걸린 것이다. 거장이든 신인이든 가리지 않고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한번씩 찾아온다는 라이터스 블록은 말 그대로 장애가 생긴 것처럼 글을 못 쓰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머릿속에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한 글자도 써내려갈 수가 없다. 지금까지 어떻게 글을 썼는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커스는 바로 이런 증세를 보이게 된다.
출판사와의 두 번째 책 계약에 따른 마감은 점점 다가오고 미칠 것 같은 상태에 빠진 작가는 대학 시절 은사를 찾아간다. 그가 바로 책 제목에 등장하는 해리 쿼버트. 그 자신도 30년 전 신인작가 시절에 같은 증세로 고생하다가 <악의 기원>이라는 걸작을 써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쿼버트는 제자인 마커스의 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 애를 쓴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스승의 집에 머물면서 어떻게든 소설을 써보려고 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스승의 책인 <악의 기원>에 얽힌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악의 기원>은 당시 15살밖에 되지 않았던 놀라라는 소녀와의 연애 이야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녀가 쿼버트와 사귄 직후 실종돼 30년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 마커스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작가인 조엘 디케르는 이 책에서 소설이 사용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교를 마음껏 구사하고 있다. 일단 스토리가 다층적인데 30년 전에 벌어진 놀라의 실종, 그 사건을 추적하면서 글을 쓰는 마커스의 이야기, 그리고 마커스의 책 내용이 얽히면서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즉 놀라의 실종사건이 해결되어야 마커스의 글쓰기도 끝나고 책 속의 책도 완성되는 것이다. 각 장의 앞부분에는 대학 시절 쿼버트가 마커스에게 알려준 ‘작가가 되기 위한 31개의 가르침’이 양념처럼 곁들여져서 그 자체로 하나의 흥밋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결말 부분에는 적어도 다섯번쯤은 뒤집어지는 반전이 있다. 프랑스 작가가 쓴, 가장 미국적인 소설. 1, 2권 합쳐서 800페이지가 넘지만 밤을 새워 읽을 만큼 재미있다.
그 자체로 신기한 ‘라이터스 블록’은 제임스 미치너가 걸작 <소설>(그렇다, 소설의 제목이 ‘소설’이다)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다. <소설>을 먼저 읽으면 등장인물들의 좌절감이 더 실감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