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클래스? 웃기고 있네. 이렇게 새파랗게 젊은데 마스터는 무슨 마스터야, 내가.” ‘최민식에게 듣는 영화 속 캐릭터 창조의 비밀’이라는 주제는 강연의 시작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은 배우로선 최초로 ‘8월의 영화마스터’로 선정된 최민식의 초기작 <해피엔드> <파이란> <올드보이>를 두고 그에게서 영화별로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었는지를 듣는 것이었다. 영화계의 오랜 콤비인 최민식과 사나이픽쳐스의 한재덕 대표는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뻐꾸기를 마음껏 날려보자”며 한바탕 질펀한 이야기판을 벌였다. 그들이 날려놓은 “두서없는 뻐꾸기”를 주섬주섬 주워모아 정리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주최하고 <씨네21>, CGV 무비꼴라쥬가 함께하는 ‘KAFA+ 마스터클래스’는 8월28일 저녁, 한재덕 대표를 모더레이터로 앞세워 ‘최민식DAY’라는 이름으로 CGV압구정에서 진행됐다.
“배우는 감독의 하청업체다”
최민식_캐릭터 창조의 비밀? 무슨 비밀이 있겠나. 감독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다. 시나리오에 다 나와 있다. 감독의 의도하에 모든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고, 감독이 원하는 대로 표현해야 한다. 배우는 하청업체에 불과하다. 시나리오를 수없이 읽고 감독과 많은 얘길 나눠야 한다. 이 시퀀스는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표현되길 바라는지, 이 인물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든 자질구레한 것까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미리 얘길 충분히 하고, 촬영장 가서는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한다. 시간이 다 돈이니까.
한재덕_그래서 캐릭터 창조의 비밀이 없다는 건가?
최민식_없다. 이런 건 있을 수 있다. 배우가 A라는 인물이 되어주길 감독이 원한다면, 배우 입장에서 A+나 A-는 어떠냐고 제안해보는 것. 받아들여지면 좋지만 감독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아닌 거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연출해야지. 역할의 한계는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감독과 잡스러운 얘길 많이 하려고 한다. 감독이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 왜 이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 어떤 영화적 세상을 꿈꾸는지 알아나가는 게 재미있다. 그러다보면 영화판에 별별 인간이 다 있단 걸 알게 된다. <해피엔드>가 끝날 즈음 서민기가 변기에 사진을 불태우며 우는 장면이 있다. 정지우 감독은 울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서민기라면 자기가 아내를 살해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벅차리라고 생각했다. 애증으로 아내를 죽였지만, 그만큼 죄책감에 괴로워할 텐데 그럼 당연히 울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우는 것과 울지 않는 것을 찍어놓고 나중에 정지우 감독이 편집 때 결정하라고 했다. 결국 우는 장면이 됐지.
“내 작품 선택의 기본 정서는 연민”
한재덕_<해피엔드> <파이란> <올드보이> 모두 어릴 때 극장에서 재밌게 봤다. 세 인물이 모두 지질한 소시민이란 공통점이 보이더라. 공교롭게도 세 작품에서 모두 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유사한 걸 선택하는 유전인자라도 있는 건가.
최민식_작품의 정서는 모두 다르다. 다만 작품을 선택할 때 나의 밑바탕에 있는 정서는 연민인 것 같다. 모두가 불쌍하다. 세상이 불쌍하고, 그 안에서 제각기 먹고살겠다고 바둥대는 사람이 불쌍하고, 나쁜 놈이든 좋은 놈이든 뚝 떨어져서 보면 모두가 다 측은하다. 나도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영화를 합네, 뭐를 합네 하면서 더운 날 이게 뭔가. 삶 자체가 그렇게 짠할 수가 없다. 삶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지랄 같나. <올드보이> 후반작업을 할 때, 어느 일요일 오전에 이런 걸 봤다. 연세 지긋하신 두 할아버지가 폼나게 차려입고 서로 손을 잡고 애들처럼 앞뒤로 신나게 흔들면서 걷고 계시더라. 운전 중이었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짠하던지 천천히 할아버지들 걸음 속도를 따라 운전하면서 계속 지켜봤다. 뭐 그리 좋은 일이 있었을까. 언제 적부터 저리 친하셨을까. 짱짱하던 시절 직업은 뭐였을까. 그런 그들은 지금 왜 저렇게 나이 들어 있나. 산다는 게 그냥 서글프게 느껴졌다. 내 나이가 쉰둘인데 늙으니 왜 공연히 서러워지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산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가.
한재덕_하도 많이 들은 얘긴데 다 같이 들으니까 들을 만하다. 배우 최민식은 철저하게 외로웠구나 싶다.
“배우의 눈물이란”
한재덕_이 장면엔 이렇게 울어야지, 저 장면엔 저렇게 울어야지 하는 게 있나.
최민식_테크닉은 중요하지 않다. 안 운다고 안 슬픈 건 아니지 않나. <파이란> 찍을 때 송해성 감독에게 고마웠던 게 있다. 여러 가지 여건상 스토리의 순서대로 촬영하긴 쉽지 않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강재가 편지를 읽으며 우는 장면을 나중에 찍고 싶다고 했다. 강재로 좀 살다가 감정이 켜켜이 쌓인 뒤에 찍으면 안되겠냐고 했는데 송 감독이 그걸 배려해줬다. 그 장면 찍을 때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으로 편지를 한번 읽어봤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다. 난 그때 진심이었고, 그러면 됐다고 본다. 내가 진짜 동했을 때, 내가 뭔가를 진짜 느꼈을 때 말이다.
한재덕_<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 앞에서 꿇어앉아 울면서 교가 부르는 장면은 두 테이크 만에 오케이났다. 교가도 예정에 없던 거였고, 시간도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추는지. 현장에 있다는 게 꿈 같았던 장면이다.
최민식_그때 유지태의 구두를 무지하게 핥았지. 유지태가 날 보고 웃는 모습이 참 좋았다. 박찬욱 감독의 디렉션이 생각난다. 오대수가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데 우진이 냉정하게 봐야 되는 거 아니냐 했더니 박 감독이 유지태 보고 웃으라고 했다. 유지태가 “여기서 웃어요?” 하니까 박 감독이 “웃어. 재밌잖아. 네가 그토록 데리고 놀고 싶어 했던 놈이 개가 돼서 드디어 네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더 갖고 놀아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지. ‘야, 저 인간 진짜 변태다!’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한 디렉션이었다. 유지태도 정확하게 잘 표현했고. 위와 아래의 정서가 아주 대비되면서 오대수는 더욱더 비굴해지고 이우진은 더욱더 위에서 찍어누르고 마지막엔 곧 허무해지지 않나. 또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싶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행복했다.
“싫으면 소비 안 하면 그만”
최민식_최고 수준의 고급예술과 포르노가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영화의 파급력? 모방범죄? 걱정 안 한다. 내가 어릴 때 야동을 봤다고 해서 지금 성범죄자가 돼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자정능력이 있다고 본다. 내가 싫으면 소비 안 하면 그만이다. 고급예술이 있으면 천박한 저질문화도 있는 건데 솎아내려는 게 무리인 것 같다. 스필버그가 <인디아나 존스>를 만들었지만, <쉰들러 리스트>나 <칼라 퍼플>도 만든 사람이다. 창작하는 사람은 속된 말로 ‘지 꼴리는 대로’ 만들어야 한다. 소비하는 사람들이 적당히 취사선택하면 된다. <악마를 보았다> 개봉시점에 그런 우려가 많았다. 악마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미친놈 장경철이 있다. 그리고 이 미친놈한테 당한 피해자가 이놈보다 더한 악마가 된다. 관객은 그걸 보고 히죽거리고, 그 잔혹한 영화를 재밌다고 생각한다. 폭력에 무감각해져 간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섬뜩한 세상에 살고 있나. 하지만 “어떤 개새끼가 저런 걸 만들었냐”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겐 그게 정답이다. 취향을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게 대중문화의 속성인 것을 어쩌겠나. <악마를 보았다>보다 더한 영화를 봐도 우린 그걸 한 창작자의 창작물로 보지 않겠나. 우린 그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지적 수준도 높다. 칸에서 <안티 크라이스트>가 상영됐을 때 관객의 반은 욕하며 나가고, 반은 휘파람 불고 박수를 쳤다. 감독의 창작물을 소비하는 행태가 너무 재밌지 않나. 영화 다 보고 나니 거리에서 다들 맥주 마시며 난상토론을 벌였다. 넌 이런 게 좋냐, 이건 어떻다 저건 어떻다 난리가 났다. 그런 토론과 현상이 사회에 부정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막연한 도덕성으로 사회를 획일화하는 게 문제다. 한 가지만 더. 대중의 취향을 배려하는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게 창작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단,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내가 만드는 영화에 투자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도 알아야 한다.
“나는 배우다”
한재덕_이 자리에 배우 지망생들이 많은 것 같다. 배우가 가져야 할 태도나 연기론에 관해 선배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최민식_배우 지망생이 많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일동 웃음) 정말 여우같은 감독은 일방적인 디렉션을 강요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잘난 체를 많이 한다. 바람이 많이 든 경우가 있는데 알고 보면 허당이다. 애들 다루듯 어르고 달래면 잘한다. 배우도 괜히 감독과 기싸움할 필요가 없다. 프로들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다. 작품 잘하자고 모인 사람들끼린데 보기 안 좋다. 단언컨대 난 한번도 촬영장에 늦게 간 적이 없다. ‘쟤보다 네가 먼저 나가면 네가 지는 거야’ 하는 기획사들이 있다. 그런 소리하는 사람은 맞아야 된다. 현장에 먼저 나가서 감독들, 스탭들과 인사도 나누고, 현장의 공기, 세트의 질감을 느끼면서 대본도 생각하며 걸어보고 해야지, 그게 왜 부끄러운 일인가. 그리고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애쓰지 마라. 감정을 정확하게 짚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테크닉이 좀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면 어떤가. 본질로 들어가라. 울면 당연히 눈밑이 씰룩거리고 콧물이 나는 건데 어떤 배우들은 콧물이 흐르면 질겁을 한다. 그게 어때서? 난 그런 거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모델이 아니다.
한재덕_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
최민식_사나이픽쳐스에서 제작한 <신세계>의 강 과장.
한재덕_그건 황정민씨 영화지. 거기서 선배가 한 게 뭐가 있나. (일동 웃음)
최민식_어쨌든 배우라면 오감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훌륭한 창작물을 많이 접해야 한다. 돈 생기면 성형하지 말고 좋은 공연을 보고 콘서트장에 가라. 외형적인 데 말고 나의 내면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돈을 썼으면 좋겠다. 진짜는 귀하다. 흔하지 않다. 내가 나를 귀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나는 예술가다. 나는 배우다. 남이 날 알아주기 전에 내가 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개차반처럼 놀다가도 촬영 들어가면 나를 차갑게 통제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부화뇌동하지 말고 처절하게 외로워봐라. 우리말이 아니라 좀 그렇긴 한데 ‘곤조’라는 말이 있지 않나. 진짜 내 자신을 냉정하게 다그치고 통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런 기질이 나와야 한다. 하려면 제대로 하고 안 할 거면 다른 사람 피해주지 말고 일찌감치 때려치워라. 나도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를 재무장한다. 훌륭한 배우가 되기까진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
한재덕_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뭐냐고 여쭤봤는데…. 아무튼 훌륭한 말씀 잘 들었다. (일동 웃음) 마지막으로 한말씀 부탁드린다.
최민식_미안합니다. (일동 웃음) 아무튼 스스로가 귀한 존재란 걸 인식해주었으면 좋겠다. 개뿔도 없는 자존심으로 버텨야 한다. 그런 거 누가 챙겨주는 거 아니다. 그거 하나로 나도 지금까지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