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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은유로서의 기차
신형철 2013-08-28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봉준호

<설국열차>

1895년 12월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상영한 최초의 영화 열편 중의 하나가 <기차의 도착>이었으니, 기차는 영화사에서 최초의 주인공인 셈이다. 그 이후로 기차가 주연으로 활약한 많은 영화들이 있었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가장 최근 사례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글들이 쓰였다. 얼마 전에 문득 다음과 같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이 글을 시작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프로이트주의자, 그리고 신화학자가 <설국열차>를 함께 본 뒤 각자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입을 연다. “기차가 얼음을 뚫고 앞으로 달리는 이야기더군요.” 이어 신화학자가 반론을 제기한다. “아니, 기차가 지구를 순환하면서 1년에 한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지요.” 그러자 프로이트주의자가 말한다. “글쎄요, 이것은 기차가 절정의 순간에 폭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일단 이런 농담을 한 뒤에 이들은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짐작해서 적어보려 한다. 이번 글은 그간 발표된 뛰어난 작품론들 옆에 주변적 읽을거리 정도로 놓일만한 글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왜 기차이고, 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인가. “오늘날 문명국이 철도 건설에 쏟는 열의와 성의는 몇 세기 전의 교회 건축에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생시몽주의자 미셸 슈발리에가 1853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조망하면서 수잔 벅 모스는 이렇게 적었다. “철도는 지시물이었고 진보는 기호였다. 공간적 운동은 역사적 운동 개념과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철도와 진보는 더이상 구분될 수 없었다.”(<보기의 변증법-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1991) 보다시피 19세기 이래로 기차는 진보의 은유였고 진보는 곧 근대성의 핵심 이념 중 하나였다. 그러니 ‘기차=진보=근대성’이라는 도식이 사람들을 지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황이 그랬으니 근대성의 해부자인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기차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니, 과장해서 말하면 그들이 쓴 모든 책은 기차에 대한 책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근대라는 기차의 설계도를 분석한 책이었고 <꿈의 해석>은 기차 객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은밀한 일들을 해석한 책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기차

마르크스가 전복하려 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체제일 뿐 진보라는 이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진보의 상징인 기차의 은유를 받아들였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 출처 표기 없이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전개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쓴 긴 논설문인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950)의 3장에 나온다. 당시 프랑스에서 선거권자의 절대 다수는 보수적인 농민계급이었기 때문에 여러 정파들이 농민계급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선전에 매진했다. “그러나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준 것은 농민계급이 선거권을 사용하면서 획득한 경험들 자체, 즉 급박하게 진행되는 혁명 속에서 연이어 농민계급을 엄습한 환멸이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농민들이 점차 변화하고 있음은 여러 가지 징후 속에서 나타났다.”(<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농민계급을 바꾼 것은 다른 누구의 선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잇따른 혁명의 환멸이 그들을 바꾸었는데, 바로 그들이 당시 역사라는 기차의 전진 동력이 됐다는 것.

위 문장이 특별히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발터 베냐민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지만 말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라는 글을 쓰기 위해 적어둔 메모를 모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관련 노트들>에 이런 말이 나온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벤야민 선집5>, 길) 당시의 베냐민에게는 ‘진보에 대한 신화적 믿음’이 가장 큰 위험으로 보였다. “진보의 의미론은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사회 개선을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며, 진보의 이미지는 지상-천국을 불가피한 어떤 것처럼 제시한다.”(수잔 벅 모스, 앞의 책) 이런 미혹에 빠져 있는 동안 역사는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냐민은 마르크스조차도 계몽주의 이래로 사람들을 지배해온 이 진보에 대한 맹신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기차 은유를 위와 같이 뒤집어야만 했다. 기차를 멈추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마르크스와 베냐민의 기차 은유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설국열차>를 보고 저 두 문장을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압제자 윌포드의 객차 앞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나 거기서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대립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엔진을 장악하고 기차를 접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는 것인가.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저 장면은 마치 마르크스와 베냐민의 논쟁처럼 보인다. 이때 윌포드의 객차 문이 열리면서 논쟁은 잠시 유보되고, 커티스는 윌포드와 대면해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피지배계급의 학교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서 기존의 혁명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이들은 오히려 지배자들이었다. 그들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시스템의 내부로 흡수해둔 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이 설국열차를 계속 달리게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는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상한 방식으로 승인하면서 그것을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더불어, 앞서 유보되었던 논쟁은 결국 남궁민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는 베냐민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일까? 남궁민수가 하려고 하는 일이야말로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일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커티스와 윌포드의 대결이 기차-근대라는 시스템 안에서의 대립이라면, 커티스-윌포드 커플과 남궁민수-요나 부녀 사이의 차이는 시스템과 그 외부 사이의 그것이다.”(변성찬, ‘봉준호의 두 가지 길’, <씨네21> 916호) 이 글의 필자는 ‘남궁민수-요나’가 표상하는 외부에의 지향이 이 영화의 핵심이며 “탈근대적이고 정치적이고 영화적인 상상력”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설득력 있는 분석과 평가이기는 하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영화의 결말 때문이다. 남궁민수-요나 부녀가 주장한 바대로 기차를 멈추고 ‘외부’를 향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차가 탈선했고 박살이 났다. 두명의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느라 잊어버리기 쉽지만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은 것이 아닌가. 이것은 꽤 심각한 결론이다. 순진하게 반문하자면, 이 영화는 이 구제불능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폭파시켜서 우리는 모두 죽어버린 뒤에, 다음 세대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주자고 말하는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희망을 말하려 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기이한 선택과 만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선택이 혼란스럽다고 느낀 이들은 꽤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를 남궁민수라는 캐릭터의 불확실성에서 찾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환각 혹은 죽음의 충동에 사로잡힌 마약중독자와 진실의 유일한 목격자 어느 쪽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이 자리가 고정되지 않으면 우리는 <설국열차>가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다.”(허문영, <씨네21> 917호) 또 어떤 이는 “서구에서 발원한 장르 규범에 도전하고 반역하는 힘을 강조하면서 내셔널 시네마의 ‘제3의 장소’를 개척해온” 것이 봉준호 감독의 미덕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장르 문법과 대결해서 찾아낸 ‘제3의 장소’가 어딘지 모호하며, “해방인지 추방인지 모호한” 이 영화의 결말은 바로 그와 연결돼 있다고 지적한다(장병원, <씨네21> 917호). 또 다른 이는 <설국열차>에는 커티스의 이야기와 남궁민수의 이야기가 따로 놀다가 결말에 이르러 설득력 없이 결합되기 때문에 그 결합 이후의 최종 결말이 희망인지 파국인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는 요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남다은, <씨네21> 918호).

서로 각도는 다르지만 세 사람 모두 이렇게 묻고 있다. <설국열차>는 지금 어디에 도착한 것인가, 애초 의도한 곳에 도착한 것이기는 한 것인가, 잘못 도착했다면 운행 경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내 식대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마르크스냐 베냐민이냐’를 묻고는 갑작스럽게 제3의 선택지를 택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앞문을 열자고 한 것은 커티스였고, 옆문을 열자고 한 것은 남궁민수였지만, 다 죽고 아이들 둘만 살리자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봉준호의 선택이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인지 희망인지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놓았다. 이와 같은 해석의 곤경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여기서 해석을 더 진전시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도달한 이 지점이 해석의 끝이라고 간주하는 것뿐이다. 커티스가 타락한 시스템을 떠맡는 결론을 우리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고, 모든 승객이 기차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하는 결론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수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설국열차>

프로이트의 기차

기차에 대해서라면 프로이트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꿈의 해석>에는 기차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특히 ‘툰 백작 꿈’(5장 2절)이나 ‘홀트후른 꿈’(6장 7절)에 대한 그의 분석을 읽어보면 당시 기차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얼마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대목들을 읽기 전에 19세기의 기차 구조를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당시 기차는 지금처럼 넓은 객차에서 하나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는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객실’에 몇 사람이 함께 머무는 구조였다. 그 객실은 다른 객실과 완전히 단절돼 있었는데, 이 폐쇄성 덕분에 당시의 기차는 두렵고 에로틱한 공간이 될 수 있었다. 객실 안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혹은 에로틱한 행위가 벌어져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명 혹은 신음 소리는 기차가 내는 소음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차는 이와 관련된 환상이 투사되는, 정신분석학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이 단락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김종엽, <프로이트와 기차>(<창작과비평> 2000년 겨울호)를 참조.) 프로이트가 <설국열차>를 봤다면 어떤 점에 주목했을까.

분명한 것은 프로이트가 이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팽팽하던 기차가 마침내 폭발하고 마는 장면은 사정(射精)을 상징합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기차는 남근, 터널은 질’ 운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설사 봉준호 감독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런 식의 해석에 대한 한발 앞선 희화화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영화에는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이 한번 나온다. ‘예카테리나 다리’를 통과하면서 ‘해피 뉴 이어’를 외친 다음 기차는 터널에 진입하고 그 어둠 속에서 피의 살육이 자행된다. 기차, 터널, 피. 여러모로 불길한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이 장면을 ‘첫 경험과 처녀막의 파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낸 글을 어디선가 보고야 말았다. 이런 해석은 틀렸다기보다는 무익한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용이 글쓴이 자신을 답답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데 그친다면, 프로이트에 대한 오용은 글쓴이만이 아니라 프로이트조차 바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해악이 더 크다.

잘 알지 못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프로이트적인 해석은 모든 사물을 성적 상징으로 변환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와 사건들에 (그런 것들일수록 더) 무의식적인 요소가 얼마나 깊숙이 ‘매개’돼 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차 그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커티스가 주인공인 서사일 것이다. 말을 바꾸면, 전자가 이 영화에서 ‘혁명의 서사’를 읽어낼 때, 후자는 ‘아들의 서사’를 읽어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들의 서사란 결국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아버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 과정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집단의 층위로 옮겨지면서 ‘어떻게 이 집단의 아버지(리더)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매개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시작되자마자 길리엄과 에드가가 커티스에게 하는 말을 통해 바로 이 문제가 영화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서둘러 알려준다. ‘네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를 ‘리더십이라는 주제에 대한 심오하고 현대적이며 정치적인 탐구’(<씨네21> 916호)라고 규정했다.)

커티스가 이 과정을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아버지(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밑에는 그를 사로잡고 있는 끈질긴 죄책감이 있다. 그는 십대 후반의 나이에 굶주림 때문에 발생한 꼬리칸의 아비규환 속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자들에 가담했었으나, 길리엄(꼬리칸의 아버지)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지옥이 진정되고 모두가 스스로 자기 팔을 잘라 공동체의 윤리적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끝내 자신의 팔을 자르는 데 실패했고, 결국 그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커티스에게 아버지-되기의 문제는 이 죄책감의 해결 과정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제는 한 차원 더 복잡해진다. ‘어떻게 커티스는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고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커티스에게는 그가 극복해야 할 아버지가 둘이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봉준호 감독의 말이다. “초반의 길리엄과 후반의 윌포드를 양극단에 놓고 모두 유사 부자관계를 맺는다면, 좋은 아버지를 떠나 나쁜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랄까. 그게 원작과 근본적으로 다른 핵심이다.”(<씨네21> 915호)

그렇다면 커티스에게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이미 주어져 있는 셈이다. 그는 나쁜 아버지를 제압함으로써 좋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집단의 아버지(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 커티스에게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순간 커티스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혼란에 빠진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과 같은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나쁜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우리 사회의 모든 아버지들은 귀가하기 전에 제 손에 묻은 피를 씻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일까.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말한다. “이것이 너의 숙명이야.” 그러니까 커티스 앞에 주어진 것은 ‘나쁜 아버지냐 좋은 아버지냐’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나쁜 아버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되기를 포기할 것인가’ 사이의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언뜻 보면 커티스는 후자를 선택한 것 같다. 그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기차는 폭발했으며, 결국 남은 것은 두명의 고아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결정적인 장면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나쁜 아버지’와 ‘좋은 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쁘고 현명한 아버지’와 ‘나쁘고 어리석은 아버지’가 있을 뿐이라는 윌포드의 설득에 흔들릴 때 커티스가 이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객차 아래에서 기계 부품처럼 일하는 아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커티스가 받은 충격은 우리가 받은 것보다 더 심원했을 것이다. 지하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은 기차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인다. 이 형상은 커티스가 17년 전에 아이를 삼켰다는 사실을 자극했을 수 있다. 그러니 커티스가 윌포드의 뒤를 잇게 된다면 그는 또 아이를 잡아먹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아이를 꺼내기를 선택했고 대신 그의 팔이 잘려나간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17년 전의 행위를 정확히 반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먹은 아이를 토해내고 당시 못 자른 팔을 뒤늦게 잘랐으니까. 그러니 그는 결국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아버지가 되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자. 이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기차는 이상한 곳에 정확하게 도착했고, 프로이트의 기차는 정확한 곳에 은밀하게 도착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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