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광주국제영화제가 ‘함께하는 평화’를 주제로 닷새 동안 여름의 끝자락을 달군다. 총 92편의 장/단편영화를 선보이는 이번 영화제에는 메인 섹션 외에 레오 매커리 감독의 1930, 40년대 코미디영화와 프랑스 사회파 감독 로베르 게디귀앙의 근작을 만날 수 있는 특별전, 그리고 5년 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배우 최진실의 자취를 더듬는 회고전 등이 준비되어 있다. 올해 상영작 중에서는 개막작 <스위트 하트 초콜릿>이나 테러에 가담했던 남자와 그를 오랜 시간 숨겨준 한 여자의 하루를 담아낸 <사랑은 어디에>와 같은 작품들이 눈에 띄지만, 전체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을 꼽으라면 가족의 위기를 다룬 영화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들을 통해서 가장 기본적인 일상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요소를 비교하며 평화와 휴머니즘이라는 영화제의 화두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하다.
왕징 감독의 <풍수>는 1990년대 중국 후안시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철저한 와해 과정을 그린다. 배우 옌빙옌이 열연한 여주인공은 남편의 충격적인 죽음 뒤 남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된 배달 일을 계속한다. 생존의 압박과 아들과의 갈등 속에서 삶은 어깨에 얹은 짐보다 더한 무게로 그녀를 짓누른다. <풍수>의 가족이 현실의 질곡을 함께 부대끼며 애증의 관계를 이어간다면, 지구 반대편의 다른 가족에게는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요원한 꿈이 된다.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스테블 라이프>는 캘리포니아에서 경주마를 돌보며 살아가는 멕시코계 이주민 가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 제목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이들의 아이러니한 삶을 지칭하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언제 또 강제 귀환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부모는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될 안정된(stable) 날만을 꿈꾸며 마구간(stable)에서의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딘다.
<달빛은 어디에?>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이제는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가족과 친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달프다. 이 다큐멘터리는 인도네시아 아째 마을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쓰나미로 인한 참혹한 기억을 딛고 어떻게 생업을 꾸려가고 있는지를 묵묵히 스케치한다. 비극을 증언하는 육성이 지속되는 동안 화면 곳곳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 풍광이 삽입되는데, 이로써 인간의 고통스런 숙명과 무정한 자연이 효과적으로 대비된다. 이 영화에 비한다면 <나의 나룻배>에 등장하는 안개 낀 강터는 주인공 부자의 사연과 한폭의 수묵화처럼 어우러진다. 수대째 강가에서 마을 사람들을 나룻배에 실어나르는 노인과 평소 그를 원망했던 아들은 함께 노를 젓고, 물을 퍼내고, 바구니를 만드는 일상을 공유하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복닥거리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경마장의 건초더미 위에서, 수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그리고 고즈넉한 강가에서 가족은 서로를 증오하거나 그리워하고, 혹은 조심스레 교감을 나눈다. 이 영화들이 비교적 느린 호흡으로 생의 굴레를 버텨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면, 경쾌한 리듬으로 가족과 이웃의 관계망을 탐구하는 영화들도 있다.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을 수다스러운 코미디와 로맨스로 풀어낸 <올모스트 퍼펙트>나 네 갈래의 사연이 한데 뒤섞여 유쾌한 소동을 일으키는 <원 데이 오어 어나더>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원 데이 오어 어나더>에서 인물들이 써내려간 편지는 지나간 인연과 현재의 짝사랑을 경유하며 바람결에 실려나간다. 어쩌면 이 편지 조각을 받아든 영화 속 마을 사람들처럼, 영화제를 방문하는 이들도 다양한 사연을 눌러 담은 영화 편지들을 받아들고, 잔잔한 감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