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이 왜 두개야?” 오계옥 사진기자가 붙잡고 묻는다. 출근할 때 가방을 두개씩 메고 다닌 지 일주일이 넘었다. 누가 보면 두툼한 법전을 지고 사는 만년 고시생이라 오해할 법도 하다. 실은 지난주부터 집에 있는 책을 회사로 조금씩 옮기고 있는 중이다. 볼품없이 늘어지는 바람에 더이상 사용하지 않던 여분의 가방에 십여권의 책을 꾹꾹 구겨넣는 것이 잠들기 전 의례가 됐다.
세간 정리를 해야겠다고 맘먹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꽁꽁 얼린 아이스젤을 수건으로 감싼 다음 양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누웠으나 끈적이는 열대야를 물리치지 못했다. 불을 켜고 멍한 표정으로 다시 앉게 되는데, 그때마다 좁은 방, 삼면에 제멋대로 쌓인 산더미 같은 책들이 눈에 거슬렸다. 먼지만 먹고사는 책들을 수중에 지니고 있어봤자 뭐할까 싶었다.
며칠은 수없이 망설였다. 죽을 때까지 완독하지 못할 것 같은 책들을 밤새 분류해놓고도 아침이면 고스란히 책장과 박스에 다시 밀어넣었다. 좀처럼 떼기 어려운 소유욕의 발동이었다. 황달 걸린 사내처럼 누렇게 뜨긴 했어도, 손때 한번 침 한번 묻히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 애써 모은 책들을 권당 1천원도 안되는 헐값으로 중고서점에 팔아치우긴 죽어도 싫었다.
책 ‘익는’ 강정마을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오늘 밤도 책무덤에 둘러싸여 질식을 호소하고 있었을 것이다. 김선우 시인은 <씨네21> 911호 ‘디스토피아로부터’에 ‘십만권의 희망’이라는 글을 썼다. “한국의 시인, 소설가 420여명이 뜻을 모아 제주도 강정마을에 평화의 책 마을을 만들기로 했고”, 그 뜻에 동참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연대는 두달 넘게 진행되고 있다.
다섯 박스 분량의 책을 먼저 보내려고 한다. 성의없는 알림 메일을 회사 내에 돌린 것이 고작인데 동료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사무실 한켠에 놓아둔 다섯개의 박스는 1주일 새 가득 찼다. 내일 아침에 윤혜지 기자는 우체국에 들러 추가로 박스를 사야 한다. 이 책들이 폭력에 짓밟힌 강정마을 사람들을 위안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를 소망한다.
☞ 십만대권 프로젝트는 9월 첫주까지 계속된다. <씨네21> 사장님도 어서 동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