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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김진혁(연출)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3-08-23

오후 8시로 예정된 촛불집회. 차가 막힐 줄 알고 조금 일찍 출발했더니 무려 30분이나 일찍 시청역에 도착했다. 묘한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기분으로 지하철 출구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데, 잔뜩 깔려 있는 경찰들 너머로 보이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은 사람들. 주최자도 아닌데 갑자기 초조해지는 마음에 온몸에서 보송보송 땀까지 올라온다.

다행히 시간을 보니 아직도 시작 십여분 전. 커피 전문점에 가서 찬 음료를 한잔 마시고 돌아올 생각으로 혼자 쫄래쫄래 광장 옆으로 걸어가니 수많은 경찰과 그 안쪽에 조르르 앉아계신 어르신들이 보인다. 어르신들 앞에서 한복을 입은 한 여가수가 전통가요를 힘차게 불러젖히는데, 이상하게도 볼륨을 엄청나게 높인 스피커는 어르신들이 아닌 시청광장쪽을 향해 있다.

그 광경을 희한하다는 듯 쳐다보며 속닥거리는 여경들을 지나쳐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니 예의 평화롭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보인다. ‘혹시 저들도 광장에 가기 전 땀을 식히려고 온 이들일까? 아니면 바로 옆 광장에서 집회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일까?’ 스무디 한잔을 시켜놓고 누가 광장에 가고 누가 안 갈지를 혼자 점찍어보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8시10분.

커피 전문점을 나와 다시 광장으로 향하는 길. 조금 전보다 더 시끄러워진 어르신들의 스피커를 지나쳐 건널목을 건너자, 언뜻 보기에도 확연하게 불어난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며 광장으로 빠르게 걸어가니 여기저기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인파로 광장은 어느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덕에 잔디도 없는 맨 뒷줄 끝에 앉았는데, 앉자마자 내 뒤편에도 계속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의 줄. 처음 도착했을 때의 걱정은 사라지고 오히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까 하는 기대감에 괜히 마음이 콩닥거렸다.

자리가 정리되자 앞에서 초가 건네졌다. 흥분된 마음에 서둘러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이려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한 어머님의 목소리. “아무개야, 촛불은 혼자 붙이면 안되고 옆사람 초로부터 붙여야 하는 거야. 그게 촛불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란다.” 순간 나에게 하는 말 같아 초 끝에 라이터를 댄 상태로 동작이 멈춰버렸지만, 그렇다고 그 타이밍에 갑자기 방긋 웃으며 초를 건넬 만한 배짱(?)이 없는 관계로 못 들은 척 슬그머니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이들이 초에 불을 붙이자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촛불집회. 수학 문제를 풀다가 걱정돼서 나왔다는 고등학생의 발언, 너무 어려서 자신의 생각이 짧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중학생의 발언, 그 발언에 웃음과 박수로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들을 보자 뭔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히 우산을 펴 드는 사람들. 우산들 아래서 조용히 울려퍼지는 <아침이슬> 제창 소리. 그리고 비에 젖은 옆자리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 철퍼덕 앉아 나를 놀라게 한 꽃미남 청년의 건강한 미소. 7월27일. 촛불집회 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