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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버킷리스트 <세상의 끝까지 21일>
이화정 2013-08-14

종말이 와도 끄떡없다. 블록버스터의 영웅이 있으니까.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이 오락 충만한 블록버스터의 신화를 일거에 깨버리는 솜씨 좋은 멜로다. 지구는 행성과의 충돌로 멸망 일보 직전이고, 남은 시간은 고작 21일이다. 전기와 전화 모두 끊긴 상황. 이쯤 되면 행성의 움직임을 제어할 영웅의 활약이 시작되고도 남을 텐데, 영화는 엉뚱하게 보험회사 세일즈맨 도지(스티브 카렐)에게 초점을 맞춘다. 집 나간 아내를 뒤로하고 그는 여전히 출퇴근을 하며 일상을 보낸다. 우연히 첫사랑이 보낸 편지가 같은 건물에 사는 여자 페니(키라 나이틀리)에게 잘못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된 도지. 일정 부분 책임을 느낀 페니는 도지의 첫사랑 찾기에 적극 동참한다. 페니는 수면과다증에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남자친구에게 빌려줬던 레코드판을 악착같이 챙겨서 들고 다니는 낙천적인 여성이다.

전 지구가 말기암 선고를 받은 상황.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같은 대서사적 묵시록, 혹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같은 자기로의 침잠 같은 종말론 등과 같은 거창한 해석은 없다. 코앞으로 다가온 파국 앞에서 <세상의 끝까지 21일>의 인물들이 던질 수 있는 실질적인 질문은 이를테면 이런 거다. 마지막으론 누구와 만날래, 어떤 음식을 먹을 건데, 아니면 음악은 어떤 장르를 들을래, 같은 일종의 버킷 리스트다. 어차피 끝나는 거라면 많이 웃고 많이 즐기고 많이 사랑하라는, 뻔하지만 확실한 제안이다. 지구 최후의 날을 세팅하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어떻게 해야 잘 사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듯하다. 도지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의 진지한 모습이 새롭다. 만약 스티브 카렐같이 코믹한 남자도 세상의 끝을 앞두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연기가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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