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인생에 앞 설수 없는 것처럼-물론 트뤼포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음악이 영화에 선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잊혀져도 음악은 잊혀지지 않을 수 있고, 음악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영화도 있습니다. 2001년 한해를 다 보낸 지금, 영화보다 더 길게 남은 음악들. 그리고 영화의 불명예를 지운 음악들.
비욕, 순진한 퇴폐의 매력 <어둠 속의 댄서> 유니버설뮤직 발매
O.S.T로서만이 아니라 2001년에 나온 음반 가운데서도 베스트의 하나로 꼽고 싶은 앨범. 나의 대학 동창 하나를 닮은 비욕은 유럽 북쪽에 분명히 흉노족 같은 오랑캐가 쳐들어갔었음을 방증하는 가수. 그녀의 매력은 그녀만의 것. 발랄함과 발칙함을 순진무구함과 섞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욕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동반하며 폭발하는 순진한 퇴폐, 뭐 그런 것.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은 ‘사운드’의 넓이 안에서 음악이 움직이고 있다. 음악은 사운드의 꽃이 아니다. 사운드의 일부일 뿐이다. 일상적인 소음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든 소리의 분위기 속에 음악을 위치시키는 것이 지금의 추세다. 이 앨범은 그렇게 하고 있다. 영화음악이니 당연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음악의 문법이 돼주고 있는 것.
우스꽝스런, 그러나 완숙한 로큰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원뮤직 발매
영화를 본 지가 오래되었으나 O.S.T를 들으며 다시 비디오를 빌려 보았다. 웃기는 가운데 황량하고 황량한 가운데 비장한 가운데 날카롭게 비꼰다. 세기말의 걸작 중 하나였다. 우스움과 황량함과 비장함을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로큰롤과 미국 바깥 사람의 관계.
세상 사람들은 이제 로큰롤을 하도 들어서 그걸 거의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의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로큰롤은 사실 아주 탄탄하게 훈련된 음악이다. 북유럽의 두 박자 브라스와 로큰롤의 8비트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카우보이의 메카, 아메리카. 이 밴드는 마음의 고향을 순례한다. 그 길바닥에서 로큰롤을 파생시킨 미국 민중의 소리를 조우한다. 이건 친미야 반미야. 언제나 정답은, 없다. 대신, 마음속에 뒤틀려 있는 애증의 겹들을 생생하게 비추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나 할까.
스무살, 그 내면의 반짝임 <고양이를 부탁해> 드림비트 발매
별이라는 인디밴드를 일약 관심의 대상으로 이끌었던 앨범. 별의 음악은 별 같다. 반복되는, 딜레이를 먹인 신시사이저 소리의 울림이 특히 그렇다. 반짝반짝. 내면적이다. 물론 영화의 소시민적인 특성에 비해 음악은 딱 그렇지는 않다. 조금 여유있으나 우울한 감성을 지닌 중산층 소년의 권태랄까, 뭐 그런 게 느껴지는 음악이다. 하여튼 좋았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 부드럽게 다가오는 밀착감. 이 영화는 보는 동안에는 굉장히 슬픈 영화인데 보고 나면 따뜻한 느낌이다. O.S.T 때문에 그런가.
잊혀진 자들의 절창 혹은 생명력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워너뮤직 발매
영화를 볼 때의 기억 하나. 화면에 자막으로 뜬 가사가 어쩌면 그렇게 시적인가. 번역한 가사가 그렇게 시적이니 원어로, 멜로디를 붙여 부르는 그 노래말은 정말 얼마나 가슴에 사무칠까. 폐허와 메카. 아니, 폐허로서의 메카. 황량하게 나부끼는 혁명의 깃발. 그러나 이 고장은 신자유주의의 기름진 유혹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거나, 아니면 이미 오래 전에 레이스를 포기하여 걸어가고 있는 마라톤 선수들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노래들 속에 배어 있는 여유와 슬픔이 거기서 나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절창. 할아버지들의 의외로 ‘삑사리’도 없고 너무나 정확한 연주. 신자유주의의 포장도로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데서 비릿한 생멱력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음악들이 월드 음악이랍시고 팔린다. 그걸 팔아먹는 나쁜 놈들. 어쨌거나 또 그런 장사치들 때문에 이런 앨범도 소개되는 거지. 이 앨범은 마스터 피스.
펑크와 글램록을 입은 70년대 <빌리 엘리어트> 유니버설뮤직 발매
영화의 끝부분에, 하늘로 박차 오르는 발레리노의 힘찬 근육이 전율을 느끼게 했던 영화. 영국사람들의 제일 원칙: 오버하지 마라. 그러나 늘 단 한번의 비약이나 도약은 필요하다. 딱 한번. O.S.T는 70년대 후반의 음악적 풍경이다. 펑크와 글램록이 디스코와 함께 음악판을 먹고 있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대표적인 글램록 밴드인 티 렉스의 음악을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 밴드의 음악성이 생각보다 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의 음악은 심플하고 자연스럽다. 리듬은 단순하고 흥겹다. 멜로디는 동요 같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꼬여 있다. 스코틀랜드 탄광지대의 파업현장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민하는 아빠의 마음속도 그만큼 꼬여 있다.
힙합으로 사는 법 <러시 아우어 2> 유니버설뮤직 발매
힙합의 메카인 데프 잼 레이블. 역시 이 영화도 솔직히 꽝이었으나 음악은 짱짱이다. 힙합의 진수를 보여주는 앨범이다. 그런데 어디 들고 나가 소개하기가 참 뭐하다. 순 욕투성이이니. 어쨌거나 이 앨범은 거의 20년 동안 뉴욕 힙합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데프 잼 레이블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힙합은 역시 미래가 있다. 생명력이 있다. 그 힘은, 거꾸로, 미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뒷골목 뮤지션들에게서 나온다. 절박함이 힙합을 먹여 살린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리듬,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랩. 딱히 할 일도 없고, 하루종일 그렇게 리듬을 먹고산다. 사는 방법으로서의 힙합. 2000년에 나온 <로미오 머스트 다이>와 함께 힙합-오리엔탈 커넥션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앨범.
확고한 스탠더드 <무사> 예전미디어 발매
일단 지난해에 나온 한국영화 중 녹음이 가장 탁월하다. 한국영화이지만 일본의 음악가인 사기스 시로가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됐던 영화이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일본사람들이 두드러지게 한국보다 발전해 있는 대목은, 그들은 ‘스탠더드’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스탠더드를 세우는 중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운드는 이미 구축된 스탠더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악기 사용도 절제되어 있고 소리들이 딱 들어갈 자리에만 들어가 있다. 이런 점들은 아직 우리가 좀 배워야겠다.
빛나는 재즈의 향연 <파인딩 포레스터> 소니뮤직 발매
재즈 팬들에게 추천한다. 재즈 기타의 귀재인 빌 프리셀의 독특한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앨범. 그의 음악은 짬뽕이다. 한쪽 끝에는 컨트리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쿨 재즈가 있다. 하와이안 스틸을 연상시키는, 길게 끌리면서 묘하게 피치가 움직이는 느린 솔로를 통해 그는 백인 재즈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파인딩 포레스터>의 음악에서도 그는 백인 작가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대목에서 강하게 작용한다. 그 음악과 더불어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오네트 콜먼의 프리 색소폰이 음악의 다른 축, 흑인의 자존심과 관계된 축을 구성하고 있다. 백인 작가와 흑인 소년의 관계. 음악적으로는 빌 프리셀과 데이비스, 콜먼이라는 두 축의 대비가 흥미롭다.
테크노의 2001년은? <툼레이더> 워너뮤직 발매
2001년 베스트 테크노 모음집이라 해도 좋다. 영화는 꽝. 그러나 음악은 짱이다. 요새 테크노가 어떻게 흘러가지? 이런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O.S.T를 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 테크노말고, 상업적인 고려를 한 탓에 U2의 모던록과 미시 엘리엇의 힙합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앨범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건 아니다. 이 앨범의 O.S.T에 불려나온 뮤지션들은 모두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팻 보이 슬림에서 BT에 이르기까지 내로라 하는 테크노 주자들이 다 나와 경쟁한다. 베이스먼트 잭스, 그루브 아마다도 지지 않는다.
화염의 광기 <지옥의 묵시록> 워너뮤직 발매
화염방사기. 슬픈 열대. 화염이 방사되어 야자수가 흔들리며 타오르는 동안 흐르는 도어즈의 <디 엔드>. 영화의 처음이 ‘끝’이다. 대담하다. 이렇게 대담한 건 자신감의 표현이겠지. 힘있다. 70년대 엠비언트의 한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에서 방사되는 소리의 화염과 소리의 광기. 음습하고 어둡고 스멀거린다. 미국사람들의 베트남전에 관한 살풀이인 이 영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오면서 버티는 그들의 저력과 자기 연민과 고백을 담고 있다. 성기완/ 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세계의 영화지와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 · 최악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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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코멘트>, 선정 최고·최악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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