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0년 전, 첫 번째 애마가 말을 달렸다. 안소영은 말한다. “내가 굴욕감을 무릅쓰고 잠자리를 요구할 때마다 당신은 냉정하게 거절했어요. 저도 사람이에요. 당신과 똑같이 하겠어요.” 가부장적 도덕률로부터 관능을 해방시킨 선언은 그렇게 시작된다. 젖은 입술, 게슴츠레 풀린 눈동자, 살포시 드러난 속살에 남자들은 넋을 잃었다. 그녀의 복수는 부드럽고 짜릿하고 황홀했다.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불그레 얼굴이 달아오른 사내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극장문을 나섰다. 부끄러워 극장 간판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던 여자들도 애마가 유혹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들도 극장의 어둠 속에서 안소영의 몸을 빌려 성애의 숲을 가로질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애마의 가슴에 매달려 걸음마를 배웠다
82년 2월6일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애마부인>은 6월11일까지 4달간 장기상영하며 31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재개봉관에 걸리던 당시 극장의 상황이나 인구비율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날 서울관객 100만명에 맞먹는 결과였다. <애마부인>은 그해 한국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작이 됐다. 82년 외화로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가 흥행 1위였고 <애마부인>은 <샤키머신> <보디히트> <레이더스> <헬나이트>에 이어 전체 순위 6위에 꼽혔다.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개인교수>가 <애마부인> 바로 다음인 7번째 흥행작으로 집계된 해였다.
지금의 10대, 20대 관객에겐 <젖소부인 바람났네>만한 울림도 전해주지 못할 영화지만 <애마부인>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에로영화는 폭발했다. 70년대를 풍미했던 <꽃순이를 아시나요>나 <나는 77번 아가씨> 같은 이른바 호스티스영화가 남녀의 육체가 포개질 때 ‘컷’을 외쳤던 반면 <애마부인>은 억눌려 있던 포르노적 욕망을 집중적으로 분출시켰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성애를 갈구하는 노골적인 환상이 그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80년대의 아이들은 애마의 풍만한 가슴에 매달려 걸음마를 배웠다.
<애마부인>이 나온 82년은 80년 광주에서 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이 이른바 3S정책을 꽃피운 시기였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라는 3S의 요소 가운데 섹스와 스크린이 결합한 프로젝트로 <애마부인>의 흥행성공이 있었고 88년 서울올림픽 유치, 프로야구 출범이 스포츠에 대한 열광을 부추겼다. 물론 <애마부인>의 흥행을 3S정책의 결과물로 단순해석할 수는 없지만 성적 묘사에 관한 검열이 조금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다. <애마부인>은 이런 시기를 잘 탔다. 비록 검열과정에서 ‘말을 사랑하는 여인’인 ‘愛馬婦人’이 ‘대마초를 사랑하는 여인’인 ‘愛麻婦人’으로 둔갑했지만 당시 기준에서 에로틱한 표현 수준이 상당했던 이 영화는 ‘노컷’으로 극장에 걸렸다.
37년간 존재했던 야간통행금지도 82년 1월6일부터 없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유흥업소의 심야영업을 풀어준 다음 중·고등학생 머리와 교복을 자유화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월 첫호에 폴란드 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의 얼굴을 내세우며 계엄령으로 치달은 폴란드의 정치상황을 다뤘고 빌보드 차트에선 J. 게일스 밴드의 <센터폴드>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이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라는 노래가 들어 있는 음반을 준비중이었고 가수 이은하는 <날마다 허물벗는 꽃뱀>이라는 영화에 출연, 배우 변신을 선언했다.
기억을 돕고자 하나 더 짚고 넘어간다면 이무렵 소니에서 출시한 베타 비디오가 널리 퍼졌다. 비디오 보급의 선봉장이 된 영화는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을 비롯한 각종 포르노였다. 당시의 연예주간지인 <주간중앙> 1월17일치는 통행금지가 해제된 직후 서울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로 강남에 새로 생긴 숙박업소를 예로 들었다. “영동의 신흥 숙박업소들이 활황이다. 이들은 컬러TV에 침대는 물론 도색필름을 구경할 수 있는 VTR 시설까지 완비, 시간제를 구가하고 있다.” 얼어붙은 정치상황 숙 달콤한 해빙
정치적인 폭압 아래 숨죽이던 사람들, 이상향을 향한 꿈과 열정이 좌절된 인간들에게 성애의 유혹은 은밀하지만 강력하게 작용한다.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가 보여주는 바이다. 이들 영화가 시대에 대한 반성과 도발이었다면 <애마부인>은 시대가 원했던 음탕함에 몸을 섞었다. 정인엽 감독은 <엠마누엘>의 영향을 부정했지만 대중은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엠마누엘>을 연상했다. 결혼한 여인의 방황을 다룬 이야기는 <보바리 부인>이나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고전에서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엠마누엘>=<애마부인>, 실비아 크리스텔=안소영’이라는 도식을 머리 속에 넣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애마부인> 신문광고 중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제 이런 비디오가 필요없다. X.” 이 광고에는 X에 괄호를 열어 ‘X는 완전성인영화의 세계공통 심벌입니다’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놓았다. 그때 서울극장 기획실장이었던 이황림 감독은 개봉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 인천, 수원 등에서 올라온 관객도 많았는데 표가 없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어떻게 해서든 들여보내 달라고 난리가 났다. 소문을 들은 일본 <NHK>에서 정인엽 감독과 배우 안소영 인터뷰를 했을 정도였다.” <애마부인>은 첫 심야상영 영화이기도 하다. 통금해제의 효과를 보고자 자정에 한회를 더 튼다는 극장쪽 계획은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처음 맛보는 심야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극장을 찾은 부부, 연인, 친구들은 <애마부인>을 보고 나와 종로3가를 메운 포장마차에서 밤을 새웠다. 정치상황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실감케 했지만 스크린이 선사한 몇 시간 동안의 달콤한 해빙마저 얼어붙게 만들지는 못했다.
<애마부인>은 그 시기 개봉했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밤마다 천국> <유부녀> 등 에로티시즘을 내세운 다른 한국영화들을 압도적으로 누르며 속편 제작이라는 운명에 포섭된다. 1대 애마 안소영에 이어 역시 풍만한 가슴을 내세운 오수비가 2편의 주인공이 됐고 3편 염해리(김부선), 4편 주리혜, 5편 소비아, 6편 주리혜+소비아, 7편 강승미, 8편 류미나, 9편 진주희, 10편 오노아, 11편 이가연 등이 말에 올랐다. 대개의 시리즈물이 그렇듯 화려한 성공신화는 2편까지로 끝났다. 3편부터 내리막길에 들어선 징조가 확연했고 뒤로 갈수록 값싼 영화의 흔적을 숨길 수 없었다.
애초에 속편 제작이 탐탁지 않았던 정인엽 감독은 3편까지 연출하고 손을 뗐다. 제작사인 연방영화사가 그뒤로 계속 시리즈를 만들자 원작자 조수비씨와 더불어 영화사를 상대로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에 대한 권리를 다투는 소송까지 냈다. 영화사가 자체적으로 시리즈를 계속하자 정인엽 감독은 88년 유혜리를 캐스팅해 <파리애마>를 연출하고 90년 이화란이 주연한 <짚시애마>를 제작했다. 관객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애마의 이미지가 안소영, 오수비, 염해리, 유혜리, 이화란인 것은 분명 정인엽이라는 연출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당대 영화인 가운데 보기드물게 관능적인 여인을 만드는 솜씨가 있었다.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브리지트 바르도를, <바바렐라>에서 제인 폰다를 섹스 스타로 만든 로저 바딤처럼 정인엽은 평론가들이 박수칠 수 없는 영화에서 한 가지를 확실히 해냈다. 대다수 남성들이 성적 환상 속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를 ‘창조’한 것이다.
애마부인, 사라져간 어떤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로 남다
오늘날 <애마부인> 시리즈는 싸구려 비디오 에로영화의 원조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적어도 시리즈의 출발점인 1편은 한국의 멜로드라마 연구자들에게 재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대를 애마의 세 남자로 설정하고 단독주택, 아파트, 초원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을 여인의 심리와 결합시킨 이야기 구조가 제법 탄탄하고 당시 사회적 공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함도 느껴진다. 가정으로 돌아가는 애마의 마지막 장면 역시 보수적인 결론이라기보다 냉소적인 결론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물론 어설픈 후시녹음, 엉뚱한 대사 때문에 이따끔 폭소를 터트릴 준비는 해야 한다).
일본의 로망포르노처럼 전복적 에너지를 뿜어낼 수도 있었던 <애마부인>은, 그러나 쉽게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사회나 영화계가 주목한 것은 은폐된 포르노의 가능성뿐이었고 태생 자체가 주류 영화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애마부인>은 순순히 그런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야기는 차츰 진부해지고 성욕을 배출하는 하수구는 점점 더러워졌다. 무엇보다 80년대에는 이런 유의 영화들이 너무 많이, 천편일률적으로 제작됐고 추레한 삼류극장에선 헉헉거리는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장선우 감독이 83년에 쓴 글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에서 “소비적인 성유희를 위해 창녀, 호스티스, 여대생, 유부녀 할 것 없이 모두 끌어내 분칠했다”고 일갈했던 대로다. 정치적 박해와 인권탄압, 고문과 의문사가 일상이던 현실에서 에로영화라는 음습한 도피처는 공분을 자아낼만했다.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녔던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애마부인>의 시나리오 작가 이문웅씨에 관한 글에서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의 그로테스크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무기력한 시대에 여체의 매혹을 피할 수 없었던 젊은 세대들에게 <애마부인>은 어떤 죄의식의 징표 같은 것이기도 했다. 딱지가 앉아 헐어버리고 새살이 돋은 그 오래된 상처를 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창진씨의 시 ‘외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른 봄, 나는 외출을 하였다. (중략) 이 낯선 곳으로 애마부인7과 외유를 나왔다./ 난 그 앞에서 문맹이 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귀중하다는 나의 한 표 행사를 고민해야 할 걱정에 싸였다가/ 딴전 피듯 파란 하늘을 본다.”(생략) 만약 이 시에서 ‘애마부인7’ 자리에 <매춘>이나 <젖소부인 바람났네> 같은 영화를 넣어도 똑같은 울림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애마부인’은 사라져간 어떤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가 됐다.
애마부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내들과 애마의 성적 도발에 가슴이 저렸던 여인들이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욕정과 황홀함, 죄의식과 해방감이 뒤섞인 기억에도 차곡차곡 먼지가 내려앉았다. “애마야, 니 몸은 언제 봐도 예뻐. 불꽃을 숨기고 있는 몸이야”라는 대사를 다시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안소영, 오수비가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다는 소식에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지는 이 아련한 추억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터넷으로, 비디오로 손쉽게 포르노를 볼 수 있는 시대에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그때 그들은, <애마부인>에서 만났던 것 같다. 남동철 namdong@hani.co.kr
▶ 불능의 시대 밤의 여왕 <애마부인> 20년, 그 환각과 도피의 초상▶ <애마부인> 감독 정인엽 인터뷰
▶ 1982년 <애마부인>, 그리고 에로영화는 어떻게 달려왔는가
▶ 기억1 <애마부인>을 따라 욕망의 비빔밥을 맛보다
▶ 기억2 고교 졸업식 예행연습날 <애마부인>을 만나다
▶ <애마부인> 20주년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