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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반감과 조롱의 새드엔딩
김선우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3-08-16

십대 시절 다이어리를 사면 맨 앞장과 뒷장에 적어두곤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당신이 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시간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고 성재기씨의 투신 소식이 들려왔을 때 가슴이 답답했다. 한달째 이어지고 있는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메이저 언론들이 이 사건에 관련한 기사들을 줄줄이 쏟아내는 것이 몹시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이런 무모한 퍼포먼스가 버젓이 카메라 앞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도대체 이게 뭔가. 속수무책의 질병, 기아, 전쟁 등 아무 잘못 없이 생사의 극한상황에 내몰려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인데, 목숨을 가지고 이러면 안되지 싶었다.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것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대해서도 한참 생각했다.

그의 사망이 확인된 시점에 ‘남성연대’는 그의 죽음이 뜻하지 않은 사고일 뿐 절대로 자살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사과문을 읽으면서도 나는 씁쓸했다. 자살을 바라보는 과도하게 경직된 이분법적 뉘앙스 때문이다. 선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 자살을 악이자 수치라고 판단한 것일 텐데,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삶의 질이 확보되지 못하는 어떤 삶은 죽음보다 비참한 것일 수도 있다. 삶의 고통이 너무 커서 자살에 이르게 된 사람들을 단지 자살자라고 해서 비난하는 일은 사람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살방지 캠페인용 훈계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겪어야 한 고통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해보지 않은 개인 혹은 사회가 자살이냐 아니냐의 결과만을 놓고 죽음의 도덕성을 판단하려는 듯한 자세는 좀 많이 불편하다.

허망한 죽음이지만, 아무튼 이 사건이 삶과 죽음의 종이 한장 같은 간극에 내장된 심연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이 죽음으로 인해 인터넷상에서는 ‘남녀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사회는 기이할 정도로 페미니즘에 대한 조롱과 오해가 심각한 편인데 대표적인 반(反)여성 커뮤니티에서 양산하는 여성비하 발언들은 언어로 저지르는 테러에 가깝다. 강박적으로 상상된 망상의 존재들과 벌이는 그들만의 전투가 끔찍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성, 계급, 인종 등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차별들 중 여성의 역사를 성찰하는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모든 차별받는 존재들과의 연대를 작동시킨다. 페미니즘이 꿈꾸는 것은 그 누구도 타고난 조건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사회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과 조롱보다는 그것을 공부하고 이해해보려는 쪽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