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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 드한] 지켜보고 싶은 창백함
김혜리 2013-08-08

데인 드한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의 스포일러가 첫 단락에 있습니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의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는 3부작을 앉은자리에서 한번에 보여주는 영화다. 정연한 3막 구조와 작위적이기까지 한 운명의 작동이 고대 비극을 방불케 한다. 부자 관계, 죄와 벌, 남자들의 멜로를 예민한 연출과 대범한 이야기로 그려낸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블루 발렌타인>과 <대부>의 만남이라고 부를 만하다. 1부의 주인공은 떠돌이 오토바이 스턴트맨 루크(라이언 고슬링), 2부의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루크와 마주친 순간 계획하지 않은 길로 인생 경로가 휘어진 경찰 에이버리(브래들리 쿠퍼)다. 기구한 인연의 두 사내에겐 동갑내기 젖먹이 아들이 있다. 불운한 루크가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은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줘”가 아니라 “나에 대해 아이에게 말하지 마”다. 루크의 어린 아들을 본 이후 죄책감을 심장에 얹은 에이버리는 아들에게 흔쾌히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아빠가 된다. ‘15년 후’라는 자막이 여는 영화의 3부에서 루크의 아들은 생부의 존재를 모르고 에이버리의 아들은 정치인으로 전신(轉身)한 잘난 아버지를 동경하는 16살 소년이 되어 마주친다. 꼬이고 엉킨 운명이 일단락되는 이 종장의 주인공은, 데인 드한이 연기하는 루크의 아들 제이슨이다. 순하고 약해보였던 소년은, 어떤 어른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혼자 생각하고, 가냘픈 팔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수단들을 그러모아 자기 방식대로 ‘청산’을 감행한다.

증오해서건, 곧이곧대로 사랑할 수 없어서건, 아버지의 그늘 아래 괴로워하는 아들은 출세작<크로니클>(2012)과 <플레이스 인 더 파인즈>, 그리고 드한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해리 오스본 역을 관통하는 데인 드한의 얼굴이다. 대부분의 출연작 속에서 그가 표현하는 인물은 돌봐줄 형이나 누나도 없는 막내처럼 보인다. 그의 캐릭터들이 치르는 싸움은 많은 경우, 인정(認定)을 얻으려는 투쟁이다.

아빠의 그림자를 짊어진 아들

엎드려 자다가 방금 일어난 듯 부스스하고 가느다란 금빛 머리칼, 안경을 잃어버린 학생처럼 찡그린 눈, 갓난아기같이 넓은 이마, 바람이 불면 펄럭댈 깡마른 사지, 흐름을 잡을 수 없는 억양의 말투와 누가 위협하면 구석에 웅크려 눈만 예리하게 치켜뜨는 어린 짐승의 움직임. 데인 드한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사랑해온 소년들을 닮았다. <파라노이드 파크> <엘리펀트> <레스트리스> 같은 반 산트 영화에 이 배우가 슥 미끄러져 들어간대도 우리는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데인 드한에게는 ‘아픈 아이’의 냄새가 난다. 눈 아래 깊게 팬 한줄의 주름은 영구적 다크서클의 효과를 내고, 어깨를 숙인 어설픈 걸음걸이가 평소에도 너무 잘 어울리는 바람에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에서 다리를 저는 인물로 나왔는데도 한동안 장애 연기라고 의식되지 않을 정도다. 비교되는 배우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드한은 2008년 브로드웨이 연극 <아메리칸 버팔로>에서 헤일리 조엘 오스몬트의 더블 캐스팅 짝꿍으로 데뷔했다. 그런가 하면 이 청년의 가장 익숙한 별칭은 ‘젊은 시절 디카프리오’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버트 그레이프>부터 <바스켓볼 다이어리> 사이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갑자기 길어진 팔다리를 거추장스러워하고, 환각제의 힘으로 세계의 벽을 한번에 뛰어넘으려는 객기가 안쓰러웠던 그 소년 말이다.

고작 스크린 데뷔 3년차의 기록이지만, 지금껏 데인 드한이 출연한 영화치고 피가 낭자하지 않거나 시놉시스에서 살인, 범죄 같은 단어가 빠지는 예는 가뭄에 콩나듯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는 물론 콜린 퍼스, 리즈 위더스푼과 공연한 신작 <악마의 매듭>(Devil’s Knot)은 세 어린이를 살해한 10대 소년 3명의 재판 이야기라고 한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의 이족이 태연히 인간과 공존하는 설정의 TV시리즈 <트루 블러드>에서도 데인 드한은 흑표범 소년으로 나와 피를 뚝뚝 흘리며 생고기를 먹는다. 만약 할리우드에서 <늑대소년>을 만든다면 데인 드한은 캐스팅 우선순위로 꼽힐 게 분명하다.

(반)영웅이 아닐지라도

닮았다지만 데인 드한은 젊은 날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보다 왜소하다. 그리고 반항아의 공격성이 훨씬 희박하다. 영화에서 그의 캐릭터가 타인을 공격하는 경우는 자폭 충동의 부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드한의 인물은 ‘파리 한 마리 못 죽이는 아이’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다. 그는 소년, 청년, 사나이, 야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영화에서 가장 여성적인 요소이기 일쑤다. 데인 드한이 분한 청년들은, 이따금 동성의 친구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간절히 듣길 원하는 표정을 짓는다.

세간에서 종말의 해로 불렸던 2012년은 데인 드한에게 본격적인 스크린 이력 개시의 해가 되었다. <크로니클>을 비롯해 톰 하디, 가이 피어스, 게리 올드먼 등과 공연한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 라이언 고슬링과 브래들리 쿠퍼에 이어 극의 무게중심을 받친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가 이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을 생애 첫 번째 카메오 출연작으로 챙기는 사치까지 누렸다. <HBO> 시리즈 <인 트리트먼트>가 대표작이었던 이 배우에게 2기가 도래한 셈이다. 주연작 <크로니클>을 제외하면 스크린 속 데인 드한은 대개 ‘친구’나 ‘아들’이며 극적으로는 촉매 역이다. 영화 한편을 짊어지는 영웅이나 반영웅은 아직 아니다. 그러나 ‘내 배우’가 할리우드의 톱이 될 것이냐를 초미의 관심사로 두는 팬이 아니라면, 드한의 행보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데인 드한은 실제로도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친구를 만들고 공부하는 일을 사랑하는, 성실하고 보기보다 사교적인 배우이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이에 호응하는 연기자라면 단기간에 현실의 우정이 성립하기도 한다.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의 상대역 샤이어 라버프, 신작 <킬 유어 달링스>의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그런 예다. 2012년 오랜 여자친구와 결혼한 드한은 아내와 함께 래드클리프의 아파트에 머물며 새해를 맞았다고 한다. 젊은 배우답게 연기를 학교로 여겨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의 절름발이 청년 역을 연기하면서는 대공황기 미국 역사와 대본을 고루 철저히 연구하고, 발날로 걸어다니는 연기를 위해 의상팀에 밑창이 경사진 구두 제작을 특별히 요청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데인 드한이 유하기만 한 배우는 아니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 그는 본래 브래들리 쿠퍼의 아들 역을 제안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본인이 끌리는 제이슨 역으로 오디션을 녹화해 보냈다. 감독은 “건방진걸?” 생각하면서도 그의 연기에 설복됐다. 그러니 데인 드한의 팬은 좀더 느긋한 마음으로 이 젊은 배우의 차근한 진보를 지켜보며 그 과정의 재미난 이벤트들을 만끽하는 편이 좋겠다. 이를테면 잘 관리된 재벌 아들 역을 위해 난생처음 몸을 만들고 있다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서 보여줄 모습이라든가 MTV 영화상의 베스트 키스 부문을 노린다는 <킬 유어 달링스>의 대니얼 래드클리프와의 키스라든가.

magic hour

<크로니클>의 셀프 카메라 신

<크로니클>은 21세기 할리우드의 두 가지 트렌드- 슈퍼히어로물과 파운드 푸티지 영화-가 나란히 거둔 가장 참신한 성취다. 또한 결코 주류적이지 않은 배우 데인 드한을 주인공 자리에 세워놓고 지그시 바라봄으로써 그의 창백한 매력을 관객이 알아볼 시간을 확보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아픈 엄마를 둔 내성적 소년 앤드류(데인 드한)는 초능력을 갖게 된다. <크로니클>은 별안간 힘을 얻은 10대 남자가 느낄 법한 <수퍼소년 앤드류>류의 신바람부터 <캐리>(그리고 <에반게리온>)의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비명까지를 포괄한다. 앤드류의 셀프 카메라 신은 그 축소판이다. 그리고 데인 드한은 그가 혼자 있을 때 얼굴을 하염없이 지켜보고픈 배우다. 염동력으로 카메라를 공중에 띄우고 즐겁게 셀카를 찍던 앤드류의 얼굴은, 문 너머 엄마의 진통제 값을 흥정하는 아빠의 통화가 들려오면서 어두워진다. 앤드류의 감정은 드한의 연기와 더불어 소년의 염력을 반영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침대에 누운 소년이 절망으로 고개를 마침내 한쪽으로 떨구면 카메라도 이불 위로 풀썩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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