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때같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해병대식 캠프에서 극기훈련을 하다 참변을 당했다.
언론은 그 해병대식 캠프가 ‘사설’ 기구였다는 것과 안전 요원들이 ‘자격증’을 갖추지 못한 것을 도마에 올렸다. 그러자 해병대쪽에서 더이상 ‘해병대’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상표 등록을 하겠단다. 교육부는 “정부가 인증한 체험활동 시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사고, 사건들을 해석하는 만능키를 또다시 꺼내든다. ‘안전불감증’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말로 인증과 자격증과 안전이 문제였던가. 안전불감증이라는 만능키로 항상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또다시 도래할지도 모를 미래의 비극에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저 상식 넘치는 인간들의 입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곤 한다. 대체 한창 꽃피워야 할 청춘들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왜 극기훈련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어떤 이는 남한이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풍경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호국단과 교련 수업이 폐지된 게 언제 적 이야기인가. 북한이 그렇게 무섭거든 차라리 소년병을 모집하자고 그러든가. 또 어떤 이는 요즘 어린 친구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극기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아무리 나약하기로서니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세상 하나 만들지 못한 채 학벌지옥 속으로 그들의 등을 무책임하게 떠미는 당신네 어른들보다 나약하겠는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대체 왜 저 소년들이 고대 성인식에 견줄 만한 고통스러운 극기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단 한줄의 합리적 변명도 발견하지 못하겠다.
한국사회를 특정짓는 ‘군사문화’, 그러니까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는 통설이 어린 소년들에게도 그대로 여과없이 투영된 결과일 뿐이다. 고대사회에서 단성생식의 신화에 저항하기 위해 남성들이 스스로의 서사를 고안하면서 만들어진 게 바로 ‘성인식’이다. 출산의 고통에 맞먹는 남성들만의 고통 의례를 지나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는 것이다. 수십개나 되는 해병대식 캠프의 난립은 이렇듯 전근대적인 통념과, 한국식 ‘노동의 윤리’를 내면화하는 순간이다. 모진 경쟁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저 강퍅한 노동의 윤리 말이다. 신자유주의 발흥 이후에, 해병대식 캠프들이 난립하기 시작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년들을 떨궈놓은 저 위험한 바다는 전쟁에 가까운 교육 시스템과 좁아터진 노동시장의 비극적 은유인 것이다.
지옥 같은 학교에 아이들을 몰아놓고 온갖 교육자본으로 돈 벌어먹고, 그 각축장 같은 학교에서 폭력이 발생하니 ‘왕따 보험’이 버젓이 만들어지고, 이래저래 치이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번엔 ‘극기’를 시킨다며 해병대 캠프에 밀어넣어 돈 벌어먹고. 이곳은 소년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꽃다운 목숨들 소식이 서럽다. 어른의 한명으로서 그저 송구할 뿐이다.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