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읽을 책이 주변에 없으면 불안해진다. 그러다보니 한때는 여행을 갈 때 적어도 대여섯권의 책을 가져가느라 끙끙대곤 했다. 가볍게 읽을 책과 모처럼 시간 날 때 정독을 하려고 벼르던 책, 그 책들을 다 읽으면 읽을 책, 세 번째 책이 재미없을 경우에 대비한 책, 그 책도 재미없을 때를 대비한 책, 이런 식으로 챙기다보면 가방이 터져나갈 지경이 됐다.
가져간 책의 절반도 읽지 못하고 돌아오는 시행착오를 몇번 겪은 뒤에야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장편이 아닌 단편집을 가져가는 것이다. 짬이 날 때마다 짧은 이야기를 한편씩 읽다보면 여러 권의 책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여름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고 갈 책은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과 정유정의 <28>이겠지만, 공항이나 역에서 잠깐 시간을 보낼 때 이야기에 빠지고 싶은 분들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집 <녹턴>을 권한다.
‘음악과 황혼에 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오랜 커플 사이에 벌어지는 극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파국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그 사이사이에는 그들의 사연을 글보다 더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음악이 버무려져 있다. “아마도 당신은 이 노래를 가능한 온갖 방식으로 들어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녹음을 한번 들어보라. 그러니까 두 번째 후렴을. 아니면 우리가 미들에잇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를. 밴드가 Ⅲ-5에서 Ⅵⅹ-9로 가는 동안 나는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의 간격을 두고 소리를 들어 올린 다음, 그 달콤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하이B플랫을 유지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신이 전에 만나본 적이 없는 빛깔들이, 염원과 회오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다섯편 중 소설적 재미가 가장 뛰어난 표제작 <녹턴>의 주인공인 색소폰 연주자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아내로부터 받은 돈으로 성형수술을 한다.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못생긴 외모 때문에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새로 만난 남자에게 부탁해서 남편의 성형수술 비용을 대준다. 굴욕적인 제안을 끝내 거절하지 못한 우리의 주인공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고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호텔에서 회복기를 보내면서 아내와 전화를 한다. 이미 끝난 부부가 통화를 마치면서 애써 일상적인 것처럼 덧붙이는 “사랑해”라는 인사말. 주인공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연주곡의 제목이 그들의 사연과 가장 거리가 먼 <더 니어니스 오브 유>(The Nearness of You)라는 점이 짧은 단편에 묘한 울림을 준다.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음악이 다 좋지만 굳이 한곡을 고른다면 두 번째 단편에 등장하는 레이 찰스의 <컴 레인 오어 컴 샤인>을 권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 따른다면 “노랫말 자체는 행복하지만 그 해석은 정말이지 가슴이 찢어지는 녹음”이 책과 함께 여행을 오래 기억에 남게 만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