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를 앞두고 대형 사고가 터졌다. 오후 근무 중이었는데 부대 내 순찰을 돌던 옆 소대 동기가 당직실에 들어와 뭔 일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뭔 일은 뭔 일. 혹시나 싶어 소대원들이 생활하는 내무반 문을 열었다. OOO 병장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몸살이라도 걸린 건가. 다른 후임병에게 물었지만 우물쭈물 답이 없었다. 한숨 자고 나면 낫겠지 싶어 돌아섰다. 그때 침상 아래 누군가가 뚝뚝 흘린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심상치 않아 이불을 젖혔다. 누워 있던 OOO 병장의 눈두덩은 새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의식도 전혀 없었다. 구급차를 불러놓은 뒤 소대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하극상이었다. 바깥에서 주먹을 쓰고 살았다는 OOO 상병이 OOO 병장이 쏟아낸 욕설을 참지 못하고 폭행을 가했던 것이다. OOO 상병은 내무반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그러는 동안 구급차가 도착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OOO 병장을 부축하고 걸으면서 반복해서 속삭였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시나리오부터 짜야 했다. 사실이 드러나면 OOO 상병이 영창을 갈뿐더러 소대원 전체가 한달 동안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며칠 뒤 의식을 되찾은 OOO 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짜맞춘 대로 대사를 읊었다. 통신보안을 우려해 모든 대사는 질문 아닌 질문이었다. “운동하다 다쳤다면서?” “몸은 괜찮아?” “역기 운동은 혼자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답이 없었다.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극상에 관해 그가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처벌의 범위와 수위는 곱절이 될 것이었다. OOO 병장이 입원해 있는 동안 헌병대 수사도 이뤄졌다. “어떻게 역기가 얼굴에 떨어졌는데 코는 멀쩡하고 눈만 다치느냐?” 추궁이 계속됐지만 전 소대원은 앵무새처럼 운동하다 다쳤다고 우겼다. OOO 병장이 수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쯤, 소대원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보름 정도 지나 이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OOO 병장이 시나리오대로 진술해서만은 아니다. 사고친 우리나 수사하는 그들이나 다 같은 헌병대대 소속이었다. 우리의 서툰 거짓말은 그들에게도 꼭 필요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공주사대부고에 다니는 5명의 학생이 ‘사설 해병대 캠프’ 교육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해병대쪽은 사설 해병대 캠프는 가짜 해병대 캠프이며, ‘해병대’의 상표등록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해병대 캠프’의 취지는 나쁘지 않다. 군대의 훈련을 모방, 어느 정도 차용해 정신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해병대의 발표에 이어 해괴한 요설도 나돈다. 가짜와 진짜의 문제일까. 이송희일 감독은 이번주 ‘디스토피아로부터’에서 “대체 한창 꽃피워야 할 청춘들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왜 극기훈련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라고 꼬집는다. 제대하고 군 생활을 함께했던 이들과 딱 한번 술자리를 가진 적 있다. 아무리 취해도 그날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설국열차>의 지배자들은 전체를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했던 그날의 거짓말도 똑같은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폭력의 시스템, 폭력의 기관차가 쉼없이 달릴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