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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알약처럼 삼키는 영화
김혜리 2013-08-02

*7월2일치 일기에 <마스터>의 스포일러가, 7월4일치에 <사이드 이펙트>의 가벼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3년이 절반이나 남았지만,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뒤집어 입고 나오는 군데군데 해진 큼직한 흰색 반팔 티셔츠는 ‘올해의 영화 의상’ 부문의 강력한 후보다. 옷이 인물과 상황을 대변한다.

7/1

2차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마스터>(2012)의 프레디 퀠(와킨 피닉스)과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19세기 석유 개발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모두 몸을 의탁할 공동체를 은밀히 갈망하는 부서진 개인이다. 두 사람은 세상이 번영할 거라는 확신이 지배하는 시대에 남몰래 정신적 미아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겪는데, 대니얼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프레디는 뒤틀린 방식으로나마 토로한다는 점이 다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두 영화에 앞서 만든 현대극 <매그놀리아>(1999)는, 트라우마를 고백하고 호소하는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아예 합창을 이루는 앙상블 영화였다. 광장을 겁내는 성격인 나는, 개인의 내밀한 심리 증세와 콤플렉스를 여럿이 둘러앉아 공유하고, 손잡고 구호를 외치며 치료하는 행위를 보면 어색하고 미심쩍다. 소통의 감각이 부러우면서도 저 해방감이 내일 아침까지 갈 수 있을까 회의가 들고 마는 것이다. 레크리에이션의 흥겨움이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처럼. 그래서 미국영화에서 비슷한 광경을 볼 때마다 살짝 몸을 뒤틀게 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근작 중 최고작을 굳이 꼽으라면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중, 가장 과묵한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선호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극중 인물들이 고독을 해소하는 수단과 표현 강도는 다를지언정 앞서 언급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세 작품은 명성, 약물, 종교의 꼴을 갖춘 신념 체계에 중독된 미국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앤더슨은 영화의 근심을 모두가 알아듣는 어법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화술로 표현한다. 앤더슨의 DVD 해설과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그는 대체로 “이렇게 찍으면 어떤 효과를 낼까?”를 가늠하지 않고 “이 장면은 이렇게 찍혀야만 한다(또는 그래야만 옳다)”는 내적인 확신으로만 결정을 내리는 천진무구한 감독이다. 훌륭한 감독을 장인과 발명가로 나눈다면, 확실히 폴 토머스 앤더슨은 영화로 내러티브를 쓰는 문법을 알아서 지어내는 소수의 발명가 그룹에 속한다. 그래서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는 100% 속속들이 읽어낼 수가 없다. 어린아이들의 속을 헤아릴 수 없듯이, 내적인 법칙으로 운동하는 예술가는 맞히기 힘든 움직이는 표적이다. 예컨대 “왜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는 어떤 공간으로 들어갈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이 내내 한방에 있었음을 한 박자 늦게 드러낼까?”라는 지엽적 궁금증부터 의표를 찌르는 편집과 음악을 무슨 내레이션처럼 집요하게 쓰는 기법에 이르기까지, 앤더슨의 영화는 편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자체 개발한 규범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마스터>에 이르러 앤더슨의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은 ‘스토리’를 손아귀에서 툭 놓아버리는 소실점(vanishing point)까지 달려간다. 사막의 지평선으로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멀어져가는 모터사이클 위의 프레디처럼. 그래서 평단으로부터 ‘앰비언트 시네마’ (ambient cinema)라는 별명까지 선사받았다. 보는 이를 안개처럼 둘러싸는 영화라는 소리일텐데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허상에 중독된 허약한 인물과 가짜 선지자들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단죄하고 풍자하는 자리에 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태도가 곧 연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매그놀리아>에서 딸을 성추행한 과거를 의심받는 불치병에 걸린 남자는 아내로부터 “당신은 혼자 외로이 죽어가도 마땅한 인간이다”라고 비난받는데, 영화는 거기서 한 호흡 더 머물러 “정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 라는 절망한 사내의 대꾸까지 들려준다. 그가 본인이 저지른 행위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는 주장은 역겨울지언정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그놀리아>가 택한 시점은 딱 그 자리다. <마스터>에 등장하는 유사 종교 단체 ‘커즈’의 지도자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사기꾼이라고 일축할 수 있는, 말하자면 ‘약장사’지만 자기가 파는 ‘약’의 효능을 믿는 약장사이며 본인도 같은 약에 중독돼 있다. (흔히 음험한 인물로 캐스팅되는 배우 호프먼을 폴 토머스 앤더슨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에 이어 <마스터>에서도 관객이 동조할 만한 캐릭터로 기용한다.) 괴상한 성분의 칵테일을 제조할 뿐 아니라 본인이 첫 번째 중독자라는 점에서 프레디와 랭카스터는 쌍둥이다. 프레디는 랭카스터에게, 베드로건 유다건 특별한 어린 양이다. 랭카스터의 아내(에이미 애덤스)를 포함해 다른 ‘사도’들이 둘의 관계를 시기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7/2

이런, 굿 같은 영화가 있나! <마스터>를 베개 밑에 깔고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꿈에 와킨 피닉스가 출연했다. 꿈속에서 클로즈업과 바스트 숏으로 잡힌 그는 누군가를 계속 때리고 있었다. 화면 양쪽에는 휑한 여백이 있었는데 막상 맞는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배우를 스크린에서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진한 이목구비 중에서도, 중심에서 왼쪽으로 현저히 치우친 인중에 시선을 붙들린다. 얼굴에 단층(斷層)이 있는 것이다. 이 조형적 어긋남 때문에 스크린 속에서 와킨 피닉스가 분한 인물들은 죄다 “나는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어야 해”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로마 제국 황제의 옥좌에 앉은 <글래디 에이터>에서도. 아니, 사실은 그 표정 때문에 리들리 스콧은 그를 병든 황제로 캐스팅했을 것이다. 와킨 피닉스에겐 기이한 서자(庶子)의 이미지가 달라붙어 있다. 나는 행복한 인물로 분한 적이 거의 없는 와킨 피닉스의 영화 가운데 <마스터>는 나름대로 해피엔딩의 영화라고 우기고 싶다.

<마스터>는 마지막에 ‘커즈’ 공동체를 떠나가는 프레디를 해변의 모래로 조각한 여인 옆에 안온한 표정으로 눕게 해준다. 영화에서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여성을 사랑하는 데에 실패하는 프레디를 목격했다. 첫사랑 도리스(완벽한 50년대 여성의 표상이었던 배우 도리스 데이와 이름이 같다)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전쟁이 끝나고 직장에서 만난 여자에게 모처럼 데이트를 청한 그는 먼저 취해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다. 프레디는 살아 있는 여성을 사랑할 기력과 능력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래 여인이 있다. ‘커즈’ 종파를 떠나 어떻게든 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 모래 사나이(sand man)는, 모래 여인을 사랑하며 그녀의 곁에서 잠깐씩 안식을 취하며 남루하나마 남은 것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 친숙한 비참함이 절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못하겠다.

7/4

영화계 잠정 은퇴를 공표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로 미국에서 극장 개봉하는 그의 마지막 장편 <사이드 이펙트>는 전반까지 현대인의 우울증을 파고드는 미국판 <멜랑콜리아>인 척 포즈를 잡다가 결국 소더버그식 <디아볼릭>으로 판명되는 깔끔한 스릴러다. 25년간 만들어진 25편의 소더버그의 장편영화 가운데 베스트 목록에 포함될 영화는 아니지만 미스터리로서, 미국사회의 스케치로서 충분히 재미있다. <사이드 이펙트> 속 미국인들은 일상의 불행한 감정을 당연한 삶의 부산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쁜 일과의 발목을 잡는 성가신 해충이나 기계의 오작동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우울을 제어하고 제거하는 신경정신과 약물에 대해 놀랄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은 항우울제를 무슨 막대사탕이나 초콜릿에 관해 이야기하듯 가볍게 언급한다. 극중 영국 출신 정신과 의사 조나단 뱅크스(주드 로)는 영국에 비해 미국이 정신과 진료에 거부감이 없어서 뉴욕에서 개업을 했다고 말한다. 소더버그는 복잡한 유통의 차트를 영화적 서사로 명료히 정리하는 작업에 탁월하다. <사이드 이펙트>에서 제약, 의료산업의 메커니즘도 그중 하나다. 이것은 세계의 전체 시스템에서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기 어려운 오늘날 소외된 관객에게 상당히 고마운 능력이다. 소더버그는 현대사회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탱하는 물질의 유통을 흥미로운 드라마로 옮기는 놀라운 재능이 있다. 그것은 때로 오염물질이기도 하고(<에린 브로코비치>), 마약이기도 하고(<트래픽>), 전염병이기도 하다(컨테이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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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림>의 대사

“비주얼은 끝내주는데 이야기가 약하다.” 블록버스터에 무차별 적용되는 이 관용구는 좀더 신중하게 구사될 필요가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에서 로봇 예거를 조종하는 두 파일럿의 교감 수준이 전투력으로 직결되는 ‘드리프트’ 시스템의 묘사는 특히 재미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갔을 때 가장 다루기 힘든 부분은 침묵이다.” 사령관의 이 대사는, 이 분망한 영화가 다 그리진 못했어도 암시하고 싶었던 바를 드러내는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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