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필자 소개에 어떤 말이 있으면 솔깃한가? 이름있는 대학의 교수나 이름있는 회사의 임원과 같은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소개에 뭐라고 되어 있건 그 위의 작가 사진에 주목하는 이미지파도 있다. 자기 계발의 시대에는 돈 많은 저자가 인기있다. 큰돈을 번 것으로 유명한 사람일수록 노하우를 전파할 자격을 인정받는다. 여튼 높은 자리 숫자건 거대한 이름이건, 저자의 존엄을 보장하는 수식어가 필자 소개를 장식한다. 자, 그럼 이 사람을 보라. 표지의 저자 이름 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최고의 HB 연필 깎기 장인.’ <연필 깎기의 정석>을 쓴 데이비드 리스다.
설마할 독자들이 많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이다. <연필 깎기의 정석>은 혼을 담아 100%의 연필을 깎아내는 법에 대한 책이다. 집과 회사에서 연필을 깎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책은, 요실금으로 시달리는 어머니를 위한 케겔운동법처럼 꼭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도 예사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리스씨가 연필 깎기에 관해 터득한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연필을 깎는 데 필요한 도구와 기술부터 그 이면의 철학까지 들여다볼 수 있죠. 불교 신자나 그 밖의 어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그렇듯 리스씨는 가장 보잘것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래놓고는 글맺음은 대뜸, “펜을 써도 상관없어요.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여기까지 얘기했는데도 설마 연필 깎기만으로 200쪽짜리 책 한권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제1장은 준비물이다. 도구를 모두 준비하는 데 1천달러가 넘지 않는다는 따뜻한 격려의 말도 있다! 연필과 주머니칼은 그렇다치고, 작업용 앞치마(설마 옷을 벗고 앞치마만 두르고 연필을 깎는다거나?), 족집게(설마 겨드랑이털을 모두 뽑기 전에는 연필을 깎을 수 없다거나?), 지폐와 잔돈(스스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 사람을 사면 된다거나?) 하는 기기묘묘한 준비물이 등장한다. 제3장에 이르면 이 책의 진지함에 온몸으로 전율하게 된다. 제3장의 제목은 몸풀기인데, 상해 및 사망 가능성을 낮추고 연필 깎기의 즐거움을 높여주는 몸풀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폭포 속에서 연필 깎는 법이나 유명인처럼 연필 깎는 법 역시 배울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책을 읽다보면 시카고 외곽에 한국 쇼핑몰이 있고 그 안에 환상의 연필나라 ‘팬시 펜슬 랜드’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체 그걸 알아서 무엇하느냐고는 묻지 말아주시라).
책 첫 대목에는 고객의 증언이 실렸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 그래픽 노블 <샌드맨>의 닐 게이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에세이스트 엘리자베스 길버트 등이 장인의 혼이 실린 연필 깎기에 대해 불평하거나 칭송한다. 이 책의 아름다움이 가장 뾰족하게 솟는 지점은 제18장 ‘마음으로 연필 깎기’다. 경건한 마음으로 책읽기를 마치고, 내 책상 위의 연필 십여 자루를 바라본다. 장비를 새로 마련해 글쟁이를 위한 연필 깎기에 도전해봐야겠다. 포스가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