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엔 가세 료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에 참여한 스탭들이 어느 광고 문구를 빌려와 하는 농담이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힘이 나는 사람이라는 뜻일 거다. 그 농담을 전해들은 그는 그냥 씩 웃기만 했다. 홍상수 감독과 가세 료가 만난 건 지난해 일본에서다. 홍상수 감독은 가세 료의 첫인상에 관해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내 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지만 어떤 배우인지는 잘 몰랐다. 출연에 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고 그냥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로비로 들어와 내쪽으로 걸어올 때 쪼가 없는 그 얼굴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촬영 중에도 감독이 배우를 아끼고 배우가 감독을 따르는 모습은 역력했다고 스탭들은 말한다. 그렇게 하여 벌써 닮은 것인가. 가세 료는 ‘귀엽다’는 홍상수식 형용사를 사용하며 인터뷰의 첫 대답을 열었다. 6월 말에 시작하여 2주 동안 촬영했던 홍상수 감독의 열여섯 번째 장편 프로젝트는 7월10일에 모든 일정을 마쳤다. 그날 낮에 가세 료를 만났다.
-이번 영화 어떨 것 같나. =정말 행복하고 귀엽다.
-홍상수 감독과 일한 느낌은 어떤가. =최고였다. 지금까지 나의 연기 경험을 통틀어 최고였다. 촬영 기간 중에 싫다고 느껴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놀랍고 새로운 발견으로 넘치는 나날들이었다. 이토록 작고도 아름다운 순간이 날마다 일어날 수 있구나, 싶었다. 홍상수 감독 자신이 일상의 아주 사사로운 것들을 즐기는 분이고 그게 영화의 과정에 전부 살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나. =홍상수 감독은 “Living Be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말 그대로 생명체라는 건 살아 있으므로 순간마다 갖가지 영향을 받으며 존재한다는 거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느끼지도 못한 커다란 사건이나 주제를 입에 올린다. 홍상수 감독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느낀 것만을 영화로 만든다. 그 때문인지 그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삶의 어떤 시간을 공유한 듯한 기분이다. 영적인 작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연출 지시를 받을 때마다 이토록 내가 신용할 수 있는 감독은 드물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알고 있다.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해변의 여인>, 이 세편을 가장 좋아한다. 가장 처음으로 본 건 (한국말로) <오! 수정>이고. 꽤 오래전에 뉴욕에서 보았다. 그때부터 관심을 갖게 됐고 그 뒤로는 극장에서 보거나 DVD로 보았다. 그의 영화는 많이 변화한 것 같다. 시선이나 수용성이 부드러워지고 상냥해졌다. 주관을 통한 자기만의 객관이 생겼다고 할까.
-배우들과의 교감은 어떠했나. =서울에 도착하던 날 다른 배우들과 만났는데 처음인데도 바로 안심이 되더라. 게다가 한 신 정도만 나오는 조역들조차 그렇게나 멋지고 훌륭하게 연기하는지. 그중에서도 농밀한 연기가 많았던 문소리야말로 정말이지 최고였고 예뻤다.
-촬영현장에서 만났을 때는 “대사가 길어서 좀 힘들다”고 혀를 내둘렀는데. =음… 그건 여전히 끝날 때까지 좀 힘든 부분이었다. (웃음)
-당신의 전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연출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미리 대본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리 대본을 주지 않는 건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이나 똑같다. 하지만 적어도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당일 아침에 주진 않는다. 2, 3일 전에는 주니까. (웃음) 중요한 건 두 감독이 유사한 것 같아도 전혀 다르다는 거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본인이 원하는 어떤 연출의 목표점이 확실하게 있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물론 어떤 계산이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거기 있는 사람과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무척 넓은 타입이다. 홍상수 감독이 내게 자주 해준 정말 인상적인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영어로)“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Let’s see what’s happening!)는 거다.
-해외의 거장 감독들과 몇 차례 일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구스 반 산트의 <레스트리스>, 옴니버스영화 <도쿄!> 중에서 미셸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전부 내가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그들의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유의 어떤 겸허함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모두 영화를 만드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홍상수 감독이 가장 순수한 자세를 지녔고, 가장 솔직하다. 영화가 영화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에게 연기란 인생 그 자체여서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만나면 구원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 말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누군가는 영화로 상을 받고 싶어 하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금 거명한 감독들은 자기의 일상에서 영화가 정말 필요해서 영화를 만든다.
-일본 내에서 활동할 때는 어떤 기분을 느끼나. =물론 일본에서의 나는 연기를 통해 돈도 벌고 밥도 먹는다. 상업영화도 하고 광고도 한다. 하지만 해외 감독과 일할 때는 내가 나에게 상을 주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일한다. 그들과 시간을 같이 지낸다는 기분으로.
-이번 영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후일 적당한 기회가 되면 더 듣기로 하고,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열정적인 시네필이라고 들었다. 어떤 영화들을 좋아하나. =아, 그 질문이라면… 잠깐 실례…. (이날의 인터뷰는 가세 료의 숙소에서 있었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고 가방을 열고 무언가 한참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뭘 찾는 걸까. 돌아온 가세 료는 종이 세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 열 몇편의 영화 스틸들이 제목과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홍상수 영화를 포함하여 에릭 로메르,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 빅토르 에리세, 장 비고, 자크 로지에, 에드워드 양, 필립 가렐, 클레어 드니 등의 대표작들이다.) 이걸 보면 된다. (웃음) 이게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너무 완벽한 것처럼 꾸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취향과도 맞는다. 음악으로 치면 뭐랄까, 나는 다소 거칠고 불완전한 데모 테이프 같은 영화들을 좋아한다.
-인상적인 목록이다. 예컨대 소흐랍 샤히드 살레스의 <고단한 삶>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알려줘 보게 됐는데,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있다. =21살인가, 22살 때인가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자신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방황하던 시기였다. 주인공 소년이 회중전등을 들고 어둠을 비추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 소년이 찾던 무엇이 바로 그 시절의 내가 찾던 무엇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거다. 그러자 그 영화가 나를 구원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비극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독립영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 양과 작업할 계획을 가져본 적은 없었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상에 없으니…. 그 밖에라면 차이밍량 같은 대만 감독 영화도 많이 좋아한다. 대만영화의 템포나 분위기에서 내가 어떤 편안함 같은 걸 느끼는 것 같다. 다만 허우샤오시엔 영화는 빼고. (웃음)
-허우샤오시엔 영화와는 어떤 점에서 안 맞는다고 느끼나. =음, 그러니까, 그의 어떤 영화들은 좋다. 하지만 대체로 나 자신이 그의 영화에 빠져들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일단 본다 해도 기억에 잘 안 남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자크 로지에의 영화도 꼽았는데.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줄거리도 없는 그런 영화다. 그런데 내 일상 어딘가에서 혹은 내 어린 시절 어딘가에서 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꼈던 어떤 감각이 그 영화들 안에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며 다시 그런 감각을 깨닫는 경험을 했다. 그러다보니 그의 영화를 보며 내내 행복했다.
-마무리해보자. 당신의 목록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작은 것들에서 중요한 것을 찾는 영화들이랄까. 당신이라는 사람의 삶과 기질과도 연관된 문제일 거다. =내가 고른 이들 영화가 지닌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퍼스낼리티’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것들은 그것대로 즐길 수 있겠지만 나의 인생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이번 영화를 찍으며 정말이지 설명하기 어려운 신기한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촬영 중 어떤 특별한 기분에 여러 번 휩싸였다. 말하자면, 아, 삶이란 건, 인생이라는 건, 정말 단 한번뿐이구나, 하는 그런 특별한 기분 말이다.
홍상수 어법을 빌린 가세 료 어법을 다시 빌려 말해보자. 대화를 마치고 보니 이상의 인터뷰 중에 적어도 한 가지 일은 막연하게라도 일어난 것 같다. 그가 이번 영화 출연의 경험을 말할 때 그리고 그가 그의 사랑하는 영화들을 밝힐 때 그가 배우를 넘어 사람으로서 무엇을 중시하고 경계하는지 우리가 느끼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가세 료가 말했다. “어제 현장편집본을 봤다. 느낌은 분명한데, 홍상수 감독 영화답게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우리의 대답도 언제나 당신과 같을 것이다. 실은 우리도 잘 모른다. 당신이 경험한 것처럼 매 순간 무수히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우리의 호기심은 다음에 당신을 다시 만나더라도 오늘과 같을 것이다. 가세 료, 당신에게는 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