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다. 재난을 대비하는 580만 가지 방법 중에 관련책 읽기는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36계 줄행랑은 비단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재난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장을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가는 일만큼 확실한 안전책이 또 어딨을까. 그런데 <생존 지침서>라니. 하긴, <세계대전Z>를 쓴 작가 맥스 브룩스는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도 펴냈었다. 좀비 천지의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한(!)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 비하면 <생존 지침서>는 은근히 써먹을 데가 많아 보인다. 허리케인, 태풍, 토네이도, 홍수, 쓰나미, 지진, 화산, 눈사태, 산사태, 산불, 가뭄과 폭염 등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처하는 법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해, 전염병과 납치, 전력 공급 중단 상황 대응법을 전하고, 나아가 건강한 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대단원은 응급처치의 기술이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고 재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산사태가 코앞인데 책 내용이 떠오를까? 일단 달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생각은 슬쩍 자취를 감춘다. 등산과 캠핑이 국민레저가 된 상황에 차량 내에 준비해둘 비상용품 목록은 어딘가에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최근 아시아나 항공기의 착륙사고 영상을 본 상황에서 비행기 비상 활강로 사용법과 비행기 탈출 경로 그림은 유난히 눈에 잘 들어온다. 대중교통에서 첨단 기기와 비싼 장비를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당부의 말에 웃을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뉴욕에서 손에 들고 있던 아이폰을 강탈당했다는 지인들의 한탄을 들은 사람으로서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싶어진다.
<생존 지침서>를 쓴 알렉산더 스틸웰은 영국에서 활동 중인 군사 및 생존 전문가다. 6년간 영국 국방의용군 소속으로 복무하면서 얻은 특수부대의 생존 전술과 기술을 바탕으로 쓴 서바이벌 테크닉에 관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바이벌 가이드가 베스트셀러가 되다니. 어쩌면 그 사실 자체가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 뒤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남들이 비웃을 때, 당신은 살아남는다.” 이것은 ‘불신지옥’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