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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해머] 깨지기를 기다리는 반듯함
김보연 2013-07-18

아미 해머

1986년에 태어나 곧 27번째 생일을 맞는 아미 해머는 이미 <소셜 네트워크>(2010)와 <J. 에드가>(2011)라는 묵직한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름을 알렸다. 큰 키와 바른 자세,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신사적인 이미지로 정적인 연기를 펼친 그는, 그러나 보란 듯이 <백설공주>(2012)에서 왕자를 연기하며 우스꽝스럽게 망가지는 역할을 해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리 브룩하이머와 고어 버빈스키의 블록버스터 <론 레인저>(2013)에서 화려한 액션영웅을 연기한다. 과연 이 거침없는 행보를 걷는 그의 연기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건강한 모범생 이미지 이상의 무엇이 있는 걸까?

아미 해머를 처음 볼 때 즉각 떠오르는 이미지는 반듯하고 바른 인상이다. 그의 이름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각인시킨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감독인 데이비드 핀처는 카메론-타일러 쌍둥이 형제를 다음과 같은 인물로 설정했다. “키가 크고, 노를 저을 줄 알며, 하버드에 다닐 것 같고, 교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키가 크고 노를 저을 수 있는 배우는 많아도 거기에 하버드 학생의 이미지와 교양까지 갖춘 배우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미 해머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까다로운 눈을 만족시켜 딱 봐도 모범생으로 보이는 부잣집 자제 역할을 따냈다.

아미 해머는 이 인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는 인물입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아미 해머가 보여준 연기가 바로 이것이다. 196cm의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그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다가와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을 때, 그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스크린 안에 확실히 각인시킨다. 가장 단순한 연기로 캐릭터의 기본을 구축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신뢰감을 주는 굵고 낮은 목소리와 신경질을 가리는 살짝 처진 눈매를 갖고 있다. 그렇게 ‘하버드 신사’의 말끔한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미 해머는 데이비드 핀처의 연출과 아론 소킨의 시나리오에 힘입어 누가 보아도 스테레오타입인 하버드 대학생의 이미지를 살짝 흔들어 그 이면에 숨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극중에서 절대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불쾌해하거나 불안해할 뿐이다. 하지만 그 반듯한 자세에서 미간을 찌푸리거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기만 해도 그의 모범생 이미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바뀐다. 그는 이미 한 인물이 내포한 각기 다른 뉘앙스를 살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속 아미 해머의 신사적인 이미지는 그 ‘효력’이 그리 길지 않다. 간단히 말해 그는 단순하고 멍청해 보인다. 본인이 직접 목소리 연기까지 했던 <심슨>의 한 에피소드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카메론-타일러 형제를 ‘빅 베이비’라고 조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노를 저으며 태연하게 신사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날아가버린 거금을 생각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이어 바로 다음 작품으로 선택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J. 에드가>에서 아미 해머는 반듯한 이미지를 더욱 복잡하게 해석해낸다.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FBI 요원이지만 그 안에 쉽게 드러내기 힘든 연약한 내면을 감춘 인물을 연기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J. 에드가 후버와의 첫 대면 자리를 기억해보자. 그는 이 위협적인 인물 앞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의 매력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리지만, 곧 그의 이런 당당하고 여유있는 모습이 자기의 연약함을 가리는 보호막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허락하지 않던 그가 딱 한번 시대가 금지한 사랑 앞에 슬프게 주저앉는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슬프고 인상적인 장면이다.

이처럼 아미 해머의 모범적이고 반듯한 이미지는 어떤 식으로든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며, 그 깨어짐의 순간이 아미 해머를 빛나게 한다. 그리고 이를 안 좋은 쪽으로 입증하는 영화가 바로 타셈 싱의 <백설공주>다. 아예 동화 속 왕자를 연기한 이 영화는 앞의 두 영화와 달리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미 해머는 허우대만 멀쩡한 채 실속은 별로 없는 왕자 역을 간신히 소화해낸다. 여전히 바른 이미지를 고수하는 그가 수북한 가슴털을 드러낸 채 7명의 난쟁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은 우습기는 하지만 왕자의 내면을 복합적으로 그리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반듯한 이미지를 그저 희극적 효과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가 작정하고 망가지는 몸연기도 곧잘 한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리고 아미 해머가 조연을 벗어나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가 바로 고어 버빈스키의 블록버스터 <론 레인저>다. 이는 그가 더이상 주연배우들의 리액션 영역에서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1930년대부터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서부극의 영웅론 레인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영화에서 아미 해머는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들 중 가장 극적인 캐릭터 변화를 선보인다.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이상한 가면을 쓰고 은행까지 털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망가지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여지없이 즐거움을 준다. 얼굴 가득 분장을 한 조니 뎁이 인디언이란 캐릭터를 구실 삼아 이상한 대사를 내뱉으며 한두개의 표정만을 줄기차게 반복할 때도 아미 해머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정면으로 통과하며 신마다 자신이 느끼는 갈등을 성실하게 연기로 옮겨낸다.

그 결과 <론 레인저>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 인물은 익숙한 방식으로 이상한 인물을 연기하는 조니 뎁이 아니라 바른길을 가려고 해도 항상 실패하고 마는,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미 해머의 론 레인저이다. 자신의 타고난 이미지를 영리하게 변주하며 극에 즐거움을 주는 아미 해머를 높게 평가한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아미 해머를 두고 “어떤 고전적인 느낌”을 가진 배우라고 설명하며 아미 해머가 “젊은 날의 제임스 스튜어트”를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다. 최근 어떤 젊은 배우도 듣지 못했던 이 엄청난 칭찬이 다소 성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희멀겋고 싱거워 보이던 젊은 날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나중에 어떻게 자신의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며 위대한 배우로 자리잡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아미 해머가 어느 날 자신의 모범적이고 반듯한 이미지 아래 숨은 무언가를 슬며시 끄집어내 누구보다 강렬한 연기의 충돌을 만들어낼 때를 즐겁게 기다려보는 것은 어떨까.

magic hour

느끼하지만 순수한

아미 해머가 출연한 네편의 주요 영화를 이야기했지만 그의 매력의 일면을 가장 극단적으로 끌어낸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 바로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연애사슬로 악명 높은 드라마 <가십걸>이다. 극중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가브리엘 에드워즈’를 연기한 아미 해머는 이 드라마에서 작정한 듯 느끼한 연기를 보여주며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명색이 악역이다보니 온갖 계략은 자신이 다 꾸민 듯,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은 자신만 독차지한 듯 자신감을 발산하지만 얼마 못 가 제대로 힘도 못 쓴 채 쓸쓸하게 퇴장하고 만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달콤한 눈빛을 보내거나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아미 해머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악의 없는 느끼함과 동정심마저 들게 하는 순수함의 최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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