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바람 소리와 힘겨운 신음으로 페이드아웃되는 기억은 누군가의 악몽이다.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악몽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며 끊임없이 대자연과 싸워온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는 해발 7925m, 그 누구도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던 ‘빛나는 벽’ 가셔브럼 4봉에 도전하는 원정대 이야기다.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가 그런 영화다. 이들은 왜 자연에 도전하는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등반의 성패보다도 자신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1995년, 꿈만 꿔오던 등반을 시작한 대원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대원들과 가깝게 지낸 슬로베니아 산악인 슬라브코의 실종과 악천후로 인해 등반에 실패한다. 2년 뒤, 수없이 좌절하고도 대원들은 모두가 실패한 그 코스에 또다시 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 최초로 등반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상에 이르러 또 하나의 놀라운 기적과 만난다.
생사를 넘나드는 갈림길에서 헤맸던 대원들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개척한 새로운 루트는 ‘코리안 다이렉트’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에 공식 기재되었다. 약간의 자료 유실로 인해 국내에서는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대원들은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우린 분명 정상에 올랐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그곳에 자신들이 있었다는 걸로 충분하다는 태도다. “역사 이래 인간은 한번도 산을 정복한 적이 없다”는 내레이션대로 산을 오르는 일은 자신을 극복하는 일임을, 대자연에 절로 무릎 꿇는 일임을 그들은 이미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조악한 화질로 간신히 찍어온 촬영 장면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가쁜 숨소리마저 눈에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