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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의심하다

웨스턴 장르의 계보와 <론 레인저>

웨스턴 장르 전통과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팀이 고안한 판타지 어드벤처 액션이 뒤섞인 <론 레인저>(2013)는 그냥 봐도 호탕하다. 놀이동산에서 스피디한 기구를 탈 때 느끼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렇긴 하나 더 즐겁게 보기 위해 장르적인 혈연관계를 추적하고, 당대적인 메시지를 추론해보자. 이 영화는 고전적인 관습 안에 시의성을 녹여낸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웨스턴은 미국의 건국신화다. 서부 개척, 문명화의 영광과 그늘이 공존하는 스토리와 정의롭지만 외로운 남성 영웅은 웨스턴의 골간을 이룬다. <론 레인저>도 화소나 도상에서 이런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건국신화에 질문을 던진다. 고전적 장르로서 웨스턴 쇠퇴 이후 등장한 새로운 웨스턴들이 던진 질문과는 다르다. 흑인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거나 백인이 인디언 문화에 동화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짐짓 전통의 수호자 같은 포즈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한바탕 놀이인 척하며 웨스턴을 뒤흔들고 나아가 미국식 정의를 의심한다. 좀 과민하게 보자면 그렇다.

미국의 정의는 과거형이다

최초의 웨스턴이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 강도>(1903)라는 점만 보아도 기차(증기기관차)와 거기서 벌어지는 추격전이 웨스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기차-강도는 소떼-카우보이와 더불어 웨스턴의 양대 축이다. 이렇게 중요한 기차에 새겨진 글자는 당연히 간과할 수 없다. <론 레인저>에 등장하는 기차에는 ‘Jupiter’와 ‘Co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씌어 있다. 그리스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로마의 신 주피터는 신들의 제왕이자 국가의 수호신이다. 이 두 단어가 적힌 칸 사이에 지방 검사가 서 있는 화면은 의미심장하다. 불문율 법체계인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의는 헌법 정신 아래 실질적인 법의 집행자인 지방 검사에 의해 수호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정의’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선량한 시민과 국가가 임명한 레인저(수비대)를 살해하고, 적대적 매수를 통해 철도 회사를 집어삼키고, 이주노동자를 착취해 은을 탈취하려는 악당을 추격하고 퇴치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 구현이라고 말한다.

본래 ‘론 레인저’는 미국 대중서사의 유명한 레퍼토리다. 우리로 치면 ‘암행어사’ 정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3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발한 <론 레인저> 시리즈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로 매체를 옮겨가며 재생산되었다. 기본 뼈대는 늘 비슷하다. 악당 손에 형을 잃은 주인공이 눈을 가리는 복면을 하고 ‘실버’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활약하는 내용이다. 인디언 톤토가 주인공을 구해주고 도와주는 것도 같다. 대중매체에서 첫 등장한 것은 1930년대지만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이다. 웨스턴이 성행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이나 서부개척이 이미 마무리되었기에 배경은 1800년대 후반부가 되는 것이다. 제리 브룩하이머와 고어 버빈스키 합작으로 이번에 다시 만들어진 <론 레인저>도 큰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액자구조다. 영화 전체의 내용이 톤토가 소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인디언생활박물관처럼 보이는 곳의 전시룸에 들어가 있는 늙은 톤토는 어린 소년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결국, 짤막한 현재가 앞, 뒤로 붙여진 플래시백 구조의 이 영화는 미국의 정의가 과거형임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전시룸에나 존재하는 인디언의 전통처럼 박제되어 명목만 있는 것이 아닐까 반문하고 있다. 플래시백의 엄연한 효과 중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음과 현존하지 않음이다. 미국식 정의가 회상되지만, 있었다고 한들 돌이킬 수 없고, 있었든 없었든 현존하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붐은 없어서 갈구하는 현상이 아닐까? <론 레인저>를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파란만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모든 이야기가 일장춘몽일 수 있듯 판타지로 보면 간단하다. 그러나 영화는 선명한 글자로 주제를 암시한다. 국가의 수호신과 헌법이란 단어를 단순히 멋부리는 기호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론 레인저>는 웨스턴 장르의 총결산 같다. 이미 <대열차 강도>는 언급했고, 무수한 웨스턴 명작 중 세편만 골라 <론 레인저>와 맥락을 비교 하고자 한다. 1900년대 초반 유행한 웨스턴은 잠시 시들한 시기를 거쳐 <역마차>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웨스턴의 대명사인 존 포드 감독과 배우 존 웨인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며 위험천만한 액션 신을 찍은 영화로 유명하다. <론 레인저> 서두에는 <역마차>에 대한 오마주라 할 만한 액션 신이 등장한다. <론 레인저> 제작팀은 아날로그 액션을 연출하기 위해 8km에 달하는 레일을 깔고 기차도 제작했다고 한다. 주연인 아미 해머와 조니 뎁은 대부분의 신을 직접 연기했다. <론 레인저> 시리즈에서 계속 사용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은 액션에 경쾌함을 증가시킨다. 같은 음악의 사용은 시리즈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 이제 주인공의 외로움으로 넘어가자.

열차 액션물, 버스터 키튼, 그리고…

제목부터 ‘외로운’(lone)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외롭겠지만 <론 레인저>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주인공 존(아미 해머)과 톤토(조니 뎁)는 모두 원한이 있는 인물이지만 화려한 모험극에서 외로울 시간은 별로 없다. <역마차>의 존 웨인, <황야의 결투>의 헨리 폰다, <셰인>의 앨런 래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명랑하다. 과거의 존과 톤토보다 현재의 늙은 톤토가 더 외로워 보인다.

<론 레인저>의 액자구조에서 재현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은 증발된다. 악당을 물리친 존은 마을을 떠난다. 그다음 이야기는 알 수 없으므로 시간이 증발된다. 웨스턴의 주인공들은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 영역에서 법과 선을 수호한 뒤에 스스로 황야로 사라진다. 또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지만 그녀와 결합하지는 않는다. 그런 비감의 절정이 <셰인>이었다. 석양으로 사라지는 셰인을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론 레인저>의 존도 형수를 사랑하지만 그녀 곁에 남지는 않는다. 이건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은 정착을 의미하고 문명은 합법적인 틀을 제공하므로 반문명과 외로움을 숙명으로 지닌 웨스턴의 주인공이 살 수 없는 조건이라 떠나는 것이다.

<황야의 결투>의 보안관은 소떼를 탈취하고 형제를 죽인 일당을 응징하고, <셰인>의 방랑자는 마을을 습격한 무리를 퇴치하고 평화를 지킨다. 고전적인 웨스턴에서는 재산을 지키는 것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악당들은 늘 가축을 훔치고 곡물을 약탈하지만 조직적인 범죄로 비치진 않는다. 이에 비해 <론 레인저>의 악당들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합법과 불법을 모두 동원한다. 철도회사 인수나 은광 채굴은 개인 재산의 탈취 정도가 아니다. 공적 인프라, 국가 자원을 훔치는 것이다. <론 레인저>에서는 이 점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리고 확대해석하면 현재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국의 다국적 침탈에 대한 은유도 읽을 수 있다. 은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중국인이라는 점도 범상치 않다. 고전 장르로서 웨스턴은 인디언, 멕시칸 정도에 관심이 있었다. <론 레인저>가 보여준 이런 시의성을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 글은 평가 이전에 보기, 읽기를 전제로 한다.

<론 레인저>를 재미있게 볼 방법은 많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와 비교해도 좋고, 열차 액션물들과 함께 보아도 좋다. 멀리는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부터 가까이는 김지운 감독의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다양한 열차 액션물이 있다. 물론, 다 필요없고 그냥 <론 레인저>만 볼 수도 있다. 이 글은 웨스턴이란 장르 관습과 전통 속에서 살폈다. 대중서사인 웨스턴은 확정된 텍스트가 없다. 미국의 건국신화인 웨스턴은 만들어지는 시기마다 당대의 정치성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론 레인저>도 시의성을 띨 수밖에 없다. 건국신화로서 웨스턴의 변하지 않는 성격은 이데올로기의 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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