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상대에게 어떤 이유로든 크게 실망했을 때 영혼에 스크래치가 나는 기분이다. 반복되면 무덤덤해지기도 하련만, 그렇지가 않다. 더 아리게 파이는 느낌이다. 영혼은 왠지 말랑할 것 같은데 그 말랑한 것에 굳은 상처가 팬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렇다. 나쁜 놈이 나쁜 짓 한 것에는 그리 크게 상처 입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와 권리, 책임을 진 자가 합당한 처신을 하지 못하는 꼴을 보는 건 참으로 힘겹다. 최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포함한 자료 일체를 여야 공히 공개하자고 결정한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 민주당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천만한 위법 행위에 동조하고 나선 것일까. 외교적으로도, 남북관계에도 대단히 나쁜 선례이다. 마구잡이로 빨간물 뿌려대는 호스를 틀어막거나 잠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제 몸에 묻은 빨간칠이 싫다고 그것만 닦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제1야당으로 있으니, 때아니게 안철수의 생각이 엄청 궁금해질 정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국가정보원의 불법 정치개입과 국가정보원장의 국가기밀 유출이라는 초유의 국기문란 행위이다. 나아가 “나도 봤다”는 여당 실세 의원의 돌출 자백을 근거로 전/현 여권 최고위층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갖고 농단을 벌인 작태이다. 이 모든 걸 파헤치고 바로잡고 막아내는 데 앞장서야 할 이들이 날밤 새워 추진한 게 고작 원본 대조라니. 이들은 과연 누굴 보고 정치를 하는 것일까.
발언에 문제없다는 자신감? 재탕/삼탕을 막겠다는 쐐기? 틀렸다. 국민의 다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실제 NLL은 건사되고 있다. 결국 ‘해석’과 ‘진의’로 지루한 정쟁이 반복되는 가운데 국가정보원의 무법/불법은 묻혀버릴 게 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어도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짓이다. 무능도 반복되면 불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