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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코스모폴리스>의 불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질문에 대하여

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이 탄 리무진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중심가가 느린 속도로 전시된다. 도시는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희뿌연 연기로 뒤덮인 거리를 소요 군중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다. 널뛰는 주가와 환율이 점멸하던 거리의 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이상한 문구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썼다(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가 첫 소개된 지난해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마르크스의 이 문장을 인용하고, 이것이 자신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현 상태를 지양(止揚)해나가는 현실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 혹은 현재적인 자본주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에너지를 비축 중인 파괴-창조적 잠재력, 혹은 자본주의의 바깥이며 피안이었다. 그러니까 유령은 지양의 운동이거나 잠재력이거나 피안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21세기 코스모폴리스의 저항자들에게는 왜 자본주의가 유령일까? 지금 이곳에서 자본주의는 현 상태를 지속시키는 전능한 기성 질서이며 가장 강력한 실재가 아닌가. 그들은 유령이라는 단어를, 추방해야 마땅한 악귀와 같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마르크스의 수사학을 빌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말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것도 아니라면 이 전자 신호는 혹시 저항자들의 구호가 아니라 극중의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메타 진술일까.

이것은 <코스모폴리스>의 그로테스크하고 모호한 이미지들과 진술들 중 하나다. 물론 이이미지들이 전부 해독을 기다리는 난수표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전광판의 숫자가 사라진 자리에 등장하는 ‘자본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전자 기호는 그 말의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영화의 무대인 뉴욕 혹은 <코스모폴리스>라는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귀기 혹은 모종의 무의식과 내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겨 말하면 ‘유령’은 두 가지 층위에 걸쳐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의 공간 나아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초월적 권능을 지칭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화폐와 신용의 세계는 “경제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선택과 폐기 혹은 합리적 제어의 대상이 아니”라는 통찰을 여기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다른 하나는 저항자들의 불능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엔 정치적 불능, 행동의 불능, 성적 불능이 모두 포함된다. 자본주의의 유령성에 관해서라면 인문학자들이 더욱 잘 말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후자이며, 이것은 나중에 다시 언급하려 한다. 어느 쪽이든, <코스모폴리스>에 들어선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지금 유령의 도시에 초대되었다.

섹스하거나 죽어가거나

억만장자 에릭 패커는 초대형 리무진을 타고 시간이 갈수록 혼란에 빠져드는 뉴욕의 중심가를 횡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목적지는 이발소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지금 거리는 같은 시간에 시내를 통과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 그리고 에릭 패커 자신에 대한 암살 위협, 거기다 소요 사태까지 겹쳐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다. 그는 경호원의 만류와 본부(영화에선 ‘complex’라고 표현된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단골 이발소에 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느리게 이동하면서 에릭이 고용한 각 분야(컴퓨터, 금융, 미술, 재정, 의사, 인문학, 심지어 랩)의 전문가들이 그의 리무진에 올라타 대화를 나누고, 차 안팎에서 아내와 몇몇 섹스 파트너를 접촉한다. 거리에선 소요가 벌어지고, 에릭은 환율 예측 실패로 알거지가 되어간다. 이런저런 경유지를 거쳐 그는 결국 이발소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이 설정은 돈 드릴로(Don DeLillo)가 2003년에 출간한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보다 더 모호하고 괴기스럽다. 드릴로의 소설에는 하드보일드 계열의 소설이 장기로 삼는 차가운 이미지 묘사들, 장광설에 가까운 혼란스럽고 뜨거운 상념들, 주인공과 전문가들이 나누는 건조한 대화가 불규칙하게 뒤섞여 있다.

크로넨버그는 상념들을 폐기하고, 이미지들은 차창 밖으로 밀어내 평면화하며, 대화는 고스란히 살려놓았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감독의 선택으로는 거의 미친 짓이다. 소설에서와 달리 주인공의 상념을 들을 수 없는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에릭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소설의 상념들을 주석 삼아 그의 동기를 이해하려는 것은 크로넨버그의 영화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크로넨버그는 심지어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동기에 힌트가 되는 소설 속 에피소드 하나를 아예 삭제해버렸다.

그 에피소드는 이렇다. 엔화(영화에선 위안화) 환율 예측 실패로 수억달러를 날린 에릭에게 시인이자 갑부의 딸인 아내는 “내 돈을 줄테니 재기하라”고 말하는데 리무진으로 돌아온 그는 해킹으로 아내의 재산 7억3500만달러를 이체한 뒤 고의적으로 날려버린다. “그렇게 한 것은 그녀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어느 때보다 더 큰 자유를 느낀다.” 소설의 주인공은 지금 자기 파괴의 쾌락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려 한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 더 정확히는 피살일 것이다.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소설의 캐릭터 스터디와는 무관한 징후의 영화다. 그렇다면 우리로선 영화사의 알려진 작품들을 참조 대상으로 삼는 것이 차라리 유용할 것 같다. 첫 번째 참조대상은 <시민 케인>(오슨 웰스, 1941)이다. 에릭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가려는 곳은 낡은 이발소이다. 케인은 ‘로즈버드’라는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말(어릴 때 탔던 썰매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을 남기고 죽는다. 이발소와 로즈버드는 동질적이다. 시스템을 장악한 두 거물에게 유년기의 기억에 속한 대상이고, 시스템 밖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로 환유되는 유년기의 낙원을 은밀하게 낭만화한다. <코스모폴리스>에서 이발소는 하나의 핑계로만 존재한다. 그곳은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며, 지독한 노동과 고문의 기억 외엔 없다. 에릭은 머리를 반만 깎고 뛰쳐나온다. 크로넨버그는 유년기의 기억을 등장시킨 뒤 은밀하게 훼손한다. 아니, 처음부터 훼손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코스모폴리스>는 로즈버드 없는 <시민 케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코스모폴리스>가 제목 때문에라도 즉각 상기시키는 또 다른 영화는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1927)이다. 하지만 ‘거대도시’와 그것의 확장판인 ‘국제도시’는 작동원리가 다르다. 이후 SF의 원형적 모티브가 된 <메트로폴리스>의,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이 인간을 초월할 때의 매혹과 공포라는 아이디어는 <코스모폴리스>의 에릭에겐 진부한 과장이며 엄살이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코스모폴리스의 시스템은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사이보그 여인과 같은 매혹적인 이미지를 더이상 갖지 않는다. 또한 그는 시스템의 강력한 조종자다. 문제는 더이상 시스템의 매혹과 공포가 아니다. 시스템 조종자의 문제는 지루함이며 그 밖의 인물들의 문제는 시기심이다. 그런 점에서 <코스모폴리스>는 매혹도 공포도 없는 <메트로폴리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참조 대상은 <이탈리아 여행>(로베르토 로셀리니, 1953)이다. 물론 부부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주인공이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빼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양자는 의미있는 대립항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기준으로 고전기 영화와 모던 시네마를 구분짓는 들뢰즈의 도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탈리아 여행>이 ‘행위의 영화’에서 ‘견자(見者)의 영화’에로의 경향적 이행기에 놓인 중대한 분기점의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부부간의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불화 외엔 문제적 상황도 긴급한 행동에의 요청도 없는 이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은 나폴리 일대를 순례한다. 주인공은 이제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시청각적 주체이다. 그녀가 목격하는 세계의 이미지들과 그것의 감흥이 느슨한 사건들의 틈새를 채운다. 문제적 상황과 해결의 행동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이 이후 모던 시네마의 끈질긴 의제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코스모폴리스>는 이 의제를 과격하게 뒤집는다. 사회적 상황(거리의 폭동, IMF 부총재 피살, 대통령 암살 위협)과 개인적 상황(투자 실패, 에릭 암살 위협) 모두 심각하다. 게다가 그는 코스모폴리스 최강의 행위자다. 실은 이 모든 문제적 상황은 사실상 그의 행위가 불러일으킨 것이다. 반면 그는 창밖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소설과 영화가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것도 이 대목이다. 소설에서 리무진의 창문은 투명한 막으로만 등장하지만, 영화에서 리무진의 창문은 리무진 밖의 현실이 영사되는 스크린과 같은 것이 되어 안과 밖을 존재론적으로 갈라놓는다. 몽환적인 윤곽과 색채, 그리고 느린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거리의 현실은 리무진의 외관을 더럽히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 외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에릭의 현실은 리무진 안에 있을 뿐이다. 그는 창문이라는 스크린에 무관심하며, 리무진 안에서 대화하는 어떤 피고용자의 얼굴도 마주 보지 않는다(그의 아내도 동류의 인간이어서 “당신, 파란 눈이네. 왜 말해주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는 뉴욕 거리를 순례하지만 보지 않는다. 대신 행위는 너무도 간단한 것이 되어, 에릭은 몇번의 모니터 터치만으로 세상을 뒤흔든다. 그는 비견자(非見者)이며 광폭한 행위자다.

그가 눈길을 보내는 것은 성욕의 대상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몸밖에 없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세계와의 감각적 관계는 단절되고 오직 디지털 신호만이 광폭한 운동력을 행사할 때 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대답이다. 섹스하거나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거나. 결국 그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행위가 아니라 관찰로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여정의 시작이다. <코스모폴리스>는 그 여정의 종언이다.

크로넨버그의 비웃음을 반박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에릭의 선택은 그가 시스템의 승자라는 특별한 조건 아래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동시대의 보편적 체험일 수 있는가. 패배자들과 저항자들의 선택은 정반대로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서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라는 유령’의 문제로 돌아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유령 같은 것이 되었다’라는 인문학적 진술이 아니라 <공산당 선언>의 혁명적 수사를 차용한 저항자의 언어라면, 그래서 마르크스가 말한 또 다른 의미의 ‘유령’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들은 어디로 향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불모의 저항이며, 저항이라는 퍼포먼스에 자족하는 저항을 위한 저항이다(이것은 토머스 프랭크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월 호에 쓴 ‘오큐파이 운동이 빠진 함정’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 <코스모폴리스>는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자체가 아니라 그 운동의 한계를 예견한 셈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에 등장하는 에릭에게 파이를 던지는 저항자, 생쥐를 들고 다니며 ‘생쥐가 화폐가 되었다’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저항자들은 그들의 ‘유령’을 말하지 못한다.

에릭을 암살하려는 패배자 베노 레빈은 “성기가 뱃속으로 쪼그라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사회적 패배와 성불능화 외에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에릭에의 열등감을 증오심으로 키워가고 있는 동안, 에릭은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최종적 비극을 완성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릭이 가진 것은 돈과 힘만이 아니다. 그는 큐레이터와 인문학자를 고용해 예술품을 소유하고 세계의 작동방식을 논한다. 그리고 반체제적 래퍼를 사랑하고 그의 매니저를 친구로 삼는다. 소설 <코스모폴리스>의 역자이며 인문학자인 조형준은 ‘시/자본 복합체’라는 용어를 썼는데, 아마도 자본가와 인문학자와 예술가의 이런 결합을 뜻할 것이다.

에릭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지금 자신의 삶 자체를 비극화하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에릭의 ‘죽음의 선택’을, 자기 파괴적 충동이라는 심리적 동기를 삭제하며, 온전한 미학적 선택으로 바꾸어놓는다. <코스모폴리스>는 그런 점에서 시스템 승리자의 미학적 승리담이기도 하다. 크로넨버그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를 묘사하며, 저항자들의 상상력과 성기능과 비미학을 비웃는다. 당신이 스스로 패배자 혹은 저항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비웃음을 반박할 수 있는가. 이것이 <코스모폴리스>의 불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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