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글을 쓸 때 특정한 버릇이 있다.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고, 원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의 버릇을 흔히 스타일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글을 빼어나게 잘 쓰는 한 선배에게 글을 쓸 때 버릇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선배가 찬찬히 읊어준 자기만의 버릇들은 ‘작가 수업’ 몇장 몇절에 고스란히 옮겨 실어도 좋을 법한, 세심하고 명료한 주문이었다. 듣다 보니 일일이 번호를 매겨 외우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듣고 나선 녹음이라도 해 둘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 선배의 글쓰기 버릇은 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글쓰기 버릇은 강박에 가깝다. 습관에도 원칙에도 스타일에도 강박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강박에는 어쨌거나 이유가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한 시간씩 글을 쓰는 이가 있다 치자.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도 떼지 않고 글을 쓰는 이에겐 그러한 행동의 근거와 효용이 있을 것이다.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침의 생기가 글쓰기를 고취시키고, 꿈의 단맛이 글쓰기를 이끈다는 그만의 믿음이 성립하기 위해 보증인은 굳이 필요없다. 단락 크기 불변의 법칙이라고 불러야 할까. 법칙이 아니라 병이고, 증상이다. 이 증세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모든 단락은 똑같은 크기를 가져야 한다. 일정한 크기로 떼내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크기로 잘라내야 한다. 첫 단락이 5줄이면, 마지막 단락도 5줄이어야 한다. 첫 단락을 10줄로 쓰면 나머지 단락의 크기가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몹쓸 강박은 언제, 어디서 몸에 밴 것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지속시간의 컷과 신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한번 상상해 보라. 운동과 리듬이 생겨날 리 없다.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지만, 나쁜 소설은 작가에 관한 진실을 알려준다”고 했다. 소설 대신 기사를, 소설 대신 영화를 대입해도 맞는 말이다. 올해 하반기에 제작에 들어가는 16편의 한국영화를 소개한다. 강박은 개인만이 지닌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도 강박이 있다. 16명의 감독들이 인터뷰에서 한 약속처럼 한국영화의 강박을 떨치려는, 용기있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시자들>의 조의석 감독은 “네 열정을 불평하는 데 쏟으면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고 했는데, 그의 말도 그런 속내를 조금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무모한 용기를 보고 싶다.
☞ 오랫동안 객원기자로 활동했던 윤혜지씨가 <씨네21> 막내 기자가 됐다. 선배(들)의 못된 버릇, 혹은 강박을 따르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