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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자본주의의 모호한 징후 또는 복잡한 근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괴이해진 진짜 이유

해괴한 영화를 만드는 데 통달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이지만 <코스모폴리스>는 더 해괴하다. 끔찍하거나 으스스한 폭력도 없고 피가 난무하지도 않으며 때론 무료하고 고요하기까지 한데 그렇다. 무엇이 이 영화에 그런 괴이함을 자아내는 것일까.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은 거대 자본주의의 어떤 지옥도일까? 김효선 평론가의 친절한 해석에 귀기울여보자.

영화 <코스모폴리스>(2012)는 이탈리아계 미국 작가 돈 드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돈 드릴로는 미국 문화에 잠재된 불안과 모순을 재현하며 서구문명의 현재와 미래를 탐구해온 작가다. 물론 이같은 설명은 <코스모폴리스>를 연출한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디오드롬>(1983)과 같은 초/중기 SF 호러 걸작들로부터 <폭력의 역사>(2005)나 <이스턴 프라미스>(2007)처럼 고전적인 근작에 이르기까지 기술문명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예견하고 사회구조와 인간 내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이어왔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서구문명의 병적인 징후를 읽어내는 일종의 선지자 역할을 담당했던 셈인데, 이 때문에 두 예술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2003년 드릴로의 원작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평단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백색 잡음>(1985), <지하세계>(1997) 같은 작가의 대표작에 비해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2011년 월가 점령 시위까지 이어지면서 소설에 묘사되었던 경제적인 혼란은 마치 하나의 예언처럼 실제 현실이 되었고, 덕분에 원작과 10여년의 시간차를 두고 나온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이제 막 증명된 예언서를 보는 듯한 생생한 현실감을 전달한다. 1%의 자본은 광포한 권력을 휘두르고, 그 권력의 슬하에서 99%가 겪는 수난은 빵과 집이라는 절박한 문제로 불거진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이 기막힌 구도가 바로 <코스모폴리스>의 오디세이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틀이다. <코스모폴리스>를 관람하는 동안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각종 담론은 화면을 끝없이 스쳐간다. 그리고 영화는 결국 그 담론으로부터도 거리를 둔 채 현실의 양극에 대한 조심스러운 성찰을 내놓는다.

지옥으로 가는 에릭의 리무진

억만장자인 28살의 투자가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슨)가 리무진을 타고 뉴욕을 가로지른다. <코스모폴리스>는 그가 리무진의 안과 밖에서 경험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에릭은 그가 태어났던 옛 동네의 허름한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다듬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은 날 미국 대통령이 맨해튼을 방문하고, 모슬렘 힙합아티스트의 장례 행렬과 반자본주의 시위까지 끼어들면서 도심 곳곳은 극심한 정체를 이룬다. 서행하는 리무진 속에서 에릭은 전산, 외환, 재정, 이론 자문을 맡고 있는 전문가들과 큐레이터, 그리고 담당 의사와 차례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수다스러운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에릭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협박범에 대한 보고를 받기도 하고, 시인이자 상속녀인 아내 엘리스 쉬프린(사라 가돈)과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그는 아내와 섹스를 원하지만 그 기대는 거듭 미끄러지고 이발소에 도착하는 일 역시 점점 요원해진다.

크로넨버그가 이 괴이한 이야기에 매료된 것은 원작의 대사 때문이었다. 그는 소설 대사의 상당 부분을 시나리오에 고스란히 옮겼고 덕분에 단 6일 만에 각색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일상적이며 암시적인, 그리하여 일견 얄팍한 말놀음으로까지 느껴지는 원작의 대사들은 종종 등장인물들이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격리된 장소에 아포리즘과 같은 대사들이 일관되게 흐르도록 함으로써 에릭의 리무진을 하나의 양식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로 재편한다. 다소 갑작스러운 비교가 되겠지만, <코스모폴리스>의 이같은 방식은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1964)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엠파이어>의 빌딩이 명멸하는 불빛과 기나긴 침묵 속에서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온갖 상념을 환기시키듯이, <코스모폴리스> 역시 침묵에 비견될 만한 파편적인 대사의 나열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각종 진단이 자본의 극점을 상징하는 에릭의 리무진 속으로 계속해서 끼어들도록 만든다.

리무진 안에서 들쭉날쭉 자리바꿈을 이어가는 말의 덩어리들 가운데 한정된 공간과 가장 인상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비자 킨 스키(서맨사 모턴)의 독백과도 같은 대사다. 에릭의 이론 자문 역할을 담당하는 비자는 ‘사람들이 급변하는 사이버자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를 던진다. 그리고 리무진 바깥에서는 마치 그녀의 경고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월가 점령 시위를 연상시키는 시위대가 거대한 쥐 모형을 들고 소요한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공산당 선언>(1848)의 첫 문장을 뒤튼 ‘자본주의의 망령이 세상에 출몰하고 있다’라는 요지의 슬로건이 깜빡인다. 여기서 에릭이 목격하는 것은 사람들을 파괴적인 저항 행위로 내모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옥도다. 이 대목에서 에릭은 마치 지옥의 수난자들을 목격하고 있는 단테와도 같으며, 비자는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처럼 단호히 지옥의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이 하루 동안의 오디세이는 에릭이 리무진에 오르는 여러 길잡이들과 함께 21세기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경유하게 되는, 알레고리적인 차원의 여정인 것이다.

이카로스의 추락

이 자본주의 지옥행에서 에릭은 마땅히 처단되어야만 할 악덕 투자가인 것일까? 분노한 시위대는 리무진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차체를 흔들며 에릭을 위협한다. 그러나 정작 에릭은 리무진 속에서 약간의 진동을 느낄 뿐이다. 에릭의 리무진은 자본가와 일반인의 세계를 철저히 분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의 대면을 위해서는 그를 리무진에서 끌어내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에릭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로 에릭 자신이다. 영화의 비유를 빌리자면 에릭은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이카로스라 할 수 있다. 그는 시간과 정보에 대한 탁월한 예측 능력으로 돈을 위한 돈, ‘자본의 추상화’를 주도해왔다. 그리고 이카로스 혹은 금기를 넘어선 파우스트의 최후처럼, 그는 결국 자신의 열망에 의해서 완벽한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에릭 스스로가 그의 실패를 지속적으로 충동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괴 혹은 죽음을 향한 에릭의 충동은, <코스모폴리스>가 자살의지로 생을 마감한 두 추상화가, 잭슨 폴록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마크 로스코의 이미지로 끝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에릭은 큐레이터인 디디 펜쳐(줄리엣 비노쉬)에게 로스코의 그림이 걸린 성당을 통째로 사들일 것을 주문한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로스코의 그림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원했다. 거대한 색채 필드로 구성된 로스코의 추상화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가 바넷 뉴먼의 작품에 대해 지적했던 것처럼, 숭고의 원초적 체험을 가능케 한다. 에릭은 추상이 되어버린 자본의 극단에 서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적 숭고의 경지에 이르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일반적인 인간 세계와 단절되어온 그는 어쩌면 그 추상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휘발시킴으로써 다시 휴머니티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야말로 가상성의 세계 속에서 현존의 확인을 가능케 할 유일한 방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죄하지 않는 결말

<코스모폴리스>의 후반부에서 에릭은 마치 자살을 결심한 사람처럼 움직이고, 결국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이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크로넨버그는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20여분의 긴 시간 동안 모든 것을 가졌던 부자와 모든 것을 잃었던 빈자, 양편의 논리를 길게 들려준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에둘러 말할 수 있는 것은 크로넨버그가 이 지점에서 어떠한 결행이나 판단도 유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스모폴리스>의 주인공은 에릭이다. 그는 비호감형 인물이지만, 영화는 단 한순간도 에릭의 시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마이클 무어라면 반대편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마땅한 단죄를 향할 것이다. 그러나 크로넨버그는 어느 한편에 서서 당위적인 명제를 도출하기보다 각각의 논리에 놓인 의미와 한계를 차분히 들여다보는 편을 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들의 대면을 불가피하게 만든 구조의 모순을 폭로한다.

그렇게 크로넨버그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또 한 차례의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덧붙인다. 2007년 금융위기 이래로 우리는 여러 장르의 영화에서 자본주의의 광기에 대한 근심과 마주해왔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의 증권거래소 습격장면처럼 99%의 반란에 놓인 비극성이 선악의 구도를 위해 편의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었고, <테이크 쉘터>(2011)의 엔딩처럼 ‘실체는 없으나 실존하고 있는 위협’이 주는 공포가 모호한 성격 그대로 시각화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모호한 징후와 복잡한 근심을 노골적인 대사와 섹스, 폭력을 통해서 구체화시키면서도 현실의 다양한 축을 거리를 두고 사유하려는 시도는 오직 크로넨버그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코스모폴리스>가 크로넨버그의 대표작이 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음울한 비전을 담으면서도 현실을 떠받치는 은밀한 논리의 심연으로 들어가 그 긴장을 버텨내고 있는, 놀랍도록 균형감있는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어쩌면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도착한 이 시대의 긴박한 예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감독에서 소설가로, 제목은 아마도 <컨슘>

<코스모폴리스> 이전에도, 크로넨버그가 소설을 각색한 예는 간간이 있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초인지대>(1983),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과 그의 개인사를 한편의 영화로 녹여낸 <네이키드 런치>(1991), 그리고 J. G. 발라드와 패트릭 맥그래스의 문제작들을 스크린에 옮긴 <크래쉬>(1996)와 <스파이더>(2002)까지, 그 스펙트럼 또한 다양했다. 영화화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이 소설들에 크로넨버그가 과감히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두 장르 언어의 차이에 대한 탁월한 직관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크로넨버그는 실제로 토론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바 있고, 여러 인터뷰에서 작가 윌리엄 버로스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 대한 애정을 피력하기도 했다.

유달리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 거장이 이번에는 직접 소설을 집필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사실 몇년 전부터 출판계에는 크로넨버그가 살먼 루시디, 필립 로스 등을 관리하고 있는 문학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었고, 곧 <컨슘>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크로넨버그가 <데인저러스 메소드>(2011), <코스모폴리스> 연출에 돌입하면서 이 계획은 유보되었고, 결국 그는 <코스모폴리스>를 끝낸 뒤에야 원고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올해 마침내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고 하니, 곧 있으면 그의 첫 소설을 만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의 기괴하고 철학적인 작품을 만날 날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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