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드 버그먼에게는 성녀의 이미지가 있다. <잔 다르크>(1949) 같은 영화의 역할 때문만은 아니다. 흥행작인 <카사블랑카>(1942) 혹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에서 보여준 청순한 이미지의 영향이 컸다. 상대방이 험프리 보가트 같은 터프가이이든 또는 게리 쿠퍼 같은 신사이든 영화 속 버그먼의 순결성은 절대 보호받아야 할 남성 판타지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남성들은 대개 보가트의 자리에서, 여성들은 버그먼의 자리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스타는 이 관계를 유지하는 허상이고, 그래서 배우들은 그런 허상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런데 버그먼은 신화의 자리, 곧 많은 배우들의 꿈인 나르시시즘의 초상이 됐을 때, 그 자리를 스스로 깬다. 바로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 보낸 연서(戀書)가 발단이다.
히치콕의 배우에서 로셀리니의 동반자로
“로셀리니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먼.”
로셀리니는 이 편지를 1948년 5월7일 로마에서 받았다. 처음엔 발신자를 의심했다. 누군가 장난한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버그먼은 히치콕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할리 우드 최고의 배우였다. 로셀리니는 네오리얼리즘의 기수로 전세계적인 작가 감독이 됐지만, 그건 연예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말은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만 안다고 쓴 발신자의 심리를 로셀리니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자’가 아닌가.
두 사람은 로마에서, 또 히치콕의 영화 <염소좌 아래에서>(1949)가 촬영 중인 런던에서, 그리고 영화제가 열리던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일을 핑계로 계속 만났다. 당시는 로셀리니가 유명 영화제의 상을 쓸어담을 때다. 그러면서 두 사람 사이의 스캔들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로셀리니는 두번 이혼한 경력에, 당시는 <무방비 도시>의 주인공인 안나 마냐니와 동거 중이었고, 버그먼은 스웨덴에서 21살 때 치과의사와 결혼하여 딸도 하나 둔 기혼녀였다. 버그먼은 1949년에 아예 이탈리아로 갔다. <스트롬볼리>(1950)를 찍기 위해서였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저택에서 나와, 지중해의 땡볕이 내리쬐는 스트롬볼리라는 화산섬에서 리얼리즘영화를 찍는 버그먼의 모습은 신선하기도, 또 생소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실망은 대단했다. 아니 일종의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 버그먼이 스웨덴의 신성으로 활약할 때,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려온 사람은 당대 최고의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그 제작자다. 셀즈닉은 1939년 <인터멧조>에 버그먼을 캐스팅하여, 스타 탄생을 알렸다. 버그먼의 할리우드 시대는 셀즈닉이라는 제작자와 히치콕이라는 최고의 감독과 팀워크를 이루면서 절정을 맞는다. 배우는 결국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인데, 버그먼은 히치콕과 연속으로 만든 세 영화들, 곧 <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염소좌 아래에서>로 그런 행운을 잡은 배우다. 히치콕은 버그먼을 스타로 키운 감독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히치콕의 분노는 대단했다. 버그먼을 다신 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감독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던 배우가 그런 조건을 놓아버렸으니, 히치콕의 감정은 어떤 패배감 혹은 배신감에서 오는 분노 같은 것일 테다. 말하자면 히치콕, 로셀리니, 버그먼은 보기에 따라서는 멜로드라마의 삼각관계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히치콕은 남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자신의 배우 버그먼을 로셀리니에게 뺏긴 것이다. 천하의 히치콕이 좀 안돼 보일 때다.
‘악의 화신’이라는 비난까지
히치콕과의 마지막 작품인 <염소좌 아래에서>는 흥행에서 실패했다. 영화계는 스트롬볼리에서의 스캔들이 미국 관객의 발길을 돌렸다고 진단했다. 특히 유부녀 신분이면서 로셀리니와 동거에 들어간 버그먼의 행위는 팬들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다. 성녀 이미지가 컸던 게 더 큰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버그먼은 더 나아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로셀리니의 아들을 낳았다(배우로 활동 중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이후 출생한 쌍둥이 딸 중 둘째). 자신들의 연인을 뺏긴 미국 관객의 반응은 히스테리컬했다. 버그먼에게 간통의 ‘주홍 글씨’를 새기려 했다. 이를테면 콜로라도의 상원의원은 버그먼을 ‘악의 화신’이라고 비난했다. 상대적으로 이탈리아 관객의 반응은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이었다. 언론에선 물론 로셀리니의 불륜을 나무랐지만, 로셀리니는 이미 여성관계가 복잡한 과거가 있는 남자이고, 또 남성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문화 덕을 봤다. 두 사람은 미국도 이탈리아도 아닌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사실 버그먼이 히치콕과의 관계를 끊은 것은 배우로선 모험이다. 최고의 활동 조건을 스스로 버린 행위다. 그런데 버그먼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봤을 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일종의 예술적 전율 같은 것인데, 그 느낌 그대로 편지를 썼다. 버그먼이 남달랐다면 성공이 어느 정도 보장된 예정된 미래보다는 설렘과 불안이 공존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선택한 점이다. 바로 이런 게 스타의 예술가적 기질 혹은 운명적 전환이 아닐까? 설사 자기파기적인 결과가 생긴다 해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모험을 시작하는 것 말이다.
버그먼은 로셀리니를 만나 소위 ‘이탈리아 시대’를 열었다. 할리우드의 스타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또 다른 상징이 된 것이다. 7년간 함께 살며 만든 로셀리니의 영화들 가운데 세 작품, 곧 <스트롬볼리>, <유럽’51>(1952), <이탈리아 기행>(1954)은 현대영화의 포문을 여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끊임없이 상찬되고 있다. 물론 버그먼이 전부 주연으로 나왔다. 말하자면 한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배우로서의 특별한 경력을 버그먼은 미국에서, 그리고 또 이탈리아에서 두번 만들었다. 버그먼은 빠르게 두번 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