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상영가 영화가 늘어난 데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서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가 최근 들어 넓어진 것과 관련이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박선이 위원장의 말이다(55쪽). 박 위원장은 5기 영등위 들어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 편수가 대폭 늘었다는 지적에 대해 “이 정도면 청소년 관람불가가 되더라, 하니까 그보다 더 센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다”고 답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기준을 완화해서 적용했더니 제한상영가 영화들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청소년 관람불가 이상 등급 판정을 받은 영화는 29.2%, 2011년부터 2012년까지는 42.5%였다(53쪽). 그렇다면 박 위원장은 이 수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청소년 관람불가 이상 등급의 영화가 늘어난 데는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서 허용하는 표현의 범위가 최근 들어 넓어진 것과 관련이 있어서일까. 이 정도면 15세 관람가가 되더라, 하니까 그보다 더 센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바깥에서 보기에 영등위는 전보다 더 보수적이 됐는데 그동안 영등위는 창작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박 위원장의 발언은 책임을 슬쩍 미루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선정성, 폭력성, 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는” 제한상영가 등급의 영화가 전보다 늘어난 것은 과연 창작자들의 무리한 욕심 때문일까. 그의 주장은 이렇게도 들린다. 영등위가 전보다 더 보수적이된 것이 아니라 영등위가 앞으로 더 보수적이 되어야 한다고. 지난해 9월 영등위는 토론회를 한 차례 개최하고 그 자료를 공개했는데, 유해영상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뿐이었다. 영등위가 청소년보호위원회인가. 영등위는 “영상물의 창작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기도 하다. 영등위는 그 책임을 온전히 다했는가. 제한상영가 논란이 일 때마다 영등위는 우린 법대로 하는데 왜 우리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책임을 회피해왔다. 박 위원장 역시 그렇게 말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영등위의 책임이 면제되진 않는다. 영화등급 분류 기준이 자의적이고 모호하며, 제한상영가 등급은 사실상 사전검열이라는 비판에 대해 영등위는 한번이라도 진지한 논쟁의 장을 마련해 영화인들과 대화한 적이 있나.
11년 전, <죽어도 좋아!>의 제한상영가 결정에 화가 난 박찬욱 감독이 격문(<씨네21> 363호)을 보내온 적 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한다. 귀를 막고 나 몰라라 하는 영등위한테 꼭 필요한 쓴소리다. “정작 여러분이 판단해서는 안될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묘사했어야 했느냐’는 질문. 한 예술가가 자기 사상을 피력하는 데 있어 어떤 표현의 수단을 구사하느냐는 전적으로 그의 영역입니다. 오시마 나기사에게 성기를 클로즈업하지 않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거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한테 그 물소를 꼭 진짜로 죽여야만 했느냐고 항의하는 건 완전히 무의미할 뿐 아니라 대단히 무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박 위원장은 영등위의 영화등급 분류 위원들 중엔 “영화감독도 있고 영화매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영등위는) YMCA 아줌마들로만 구성된 기구가 아니”라고 했다. 전문성을 갖춘 분들이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박 위원장의 항변이 혹여 창작자에게 “꼭 그렇게까지 찍어야 했느냐”는 무례한 질문이 아니길.
☞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앤서니 루이스 지음, 도서출판 간장 펴냄)라는 책이 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