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흄은 <휴먼 네이처론(論)>이라는 책에서 오성과 정념과 도덕의 더미를 면도날로 한켜 한켜 베어내듯 분석하며 경험주의적 인간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세권짜리 저작은 로크나 버클리 등 영국인 선배들의 경험론과 독일인 후배 칸트의 비판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은 기념비적 문건이지만, 오늘날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 18세기 철학자의 지루한 책을 정독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1세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휴먼 네이처론>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돈을 들여 미셸 공드리의 <휴먼 네이쳐>를 볼 수 있다. 마음도 사뭇 가볍다. 값이 싸게 먹혀서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골치 아플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은 <휴먼 네이처론>을 썼을 때의 영국 철학자보다 열살이나 더 먹었지만, ‘휴먼 네이처’를 바라보는 시각은 열살 이상 젊다. 인상과 관념, 기억과 상상력, 직접적 정념과 간접적 정념, 쾌와 불쾌, 정의와 불의 같은 골때리는 개념들을 조작하며 지적 체조를 벌였던 흄과는 달리, 공드리는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지닌 서너 사람의 행태를 우스개 삼아 보여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휴먼 네이처는 섹스라고. 그래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에피소드들은 휴먼 네이처와 애니멀 네이처의 경계를 하나하나 지워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휴먼은 네이처에 먹힌다. 아니, 행동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자극-반응 모델의 학습을 통해 테이블매너를 꼼꼼히 익히든, 옷으로 몸을 가리는 법을 배우든, 욕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든, 본디부터 휴먼은 네이처 안에 있었고 앞으로도 거기 있을 것이다, 라고 공드리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팸플릿을 보니 영화 <휴먼 네이쳐>는 ‘유쾌한 인간본성 탐구!’라고 한다. 그러니까 <휴먼 네이쳐>의 우리말 제목은 ‘인간의 본성’인 셈이다. ‘본성’이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네이처는 라틴어 단어 나투라가 프랑스어를 거쳐서 수입된 것이다. 나투라는 ‘태어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다. 그래서 나투라는 본디 ‘태어난다는 사실, 태어나게 하는 행위’를 뜻했다. 그런 본래의 뜻에서 기원, 혈통, 본성 같은 뜻이 파생되었고, 그뒤 로마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자연’이라고 번역하는 그리스어 퓌시스를 나투라라고 번역함으로써 이 단어는 물질계의 삼라만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투라는 모든 피조물, 자연인 셈이다.
그러나 인격신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神)조차 자연이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권에 속해 있던 12세기에 코르도바와 세빌랴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븐 루쉬드라는 사나이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유럽어권에는 아베로에스라고 알려진 이 사나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에 대해 치밀한 주석을 남김으로써 고대 그리스와 근대 유럽을 인문주의의 실로 이어놓은 사람이다. 이슬람 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이단으로 몰려 코르도바 근처에서 징역살이를 하기도 했는데, 그 빌미가 된 것이 그의 범신론적 세계관이었다. 이븐 루쉬드는 자연을 능산적(能産的) 자연 곧 태어나게 하는 자연과 소산적(所産的) 자연 곧 태어난 자연으로 나누었다. 능산적 자연은 (신이라고 부르든 알라라고 부르든 여호와라고 부르든) 신심 속의 무제약적 존재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더 넓게는 어떤 우주적 질서나 유기적 생산력을 가리킨다. 소산적 자연은 좁은 의미의 자연 말하자면 피조물이다.
기독교인들의 이베리아 재정복이 완료된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은 이슬람 학자들이 남겨놓은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자신들의 잃어버린 고대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이븐 루쉬드의 능산적 자연을 나투라 나투란스로, 소산적 자연을 나투라 나투라타로 번역했다. 이 구별은 유럽의 범신론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비쳤고, 장작더미 위에서 죽은 브루노를 거쳐 마침내 <에티카>의 저자 스피노자의 펜을 통해 유럽 철학사에서 영토를 확보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맛이 느껴지지 않지만, 라틴어의 나투라 나투란스와 나투라 나투라타는 말맛이 독특하다. 모두 ‘태어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들이기 때문이다. 나투라의 어원을 생각하면 그것은 태어나게 하는 태어남, 태어난 태어남 정도를 의미한다.
나투라(네이처)를 본성이라고 번역하든 자연이라고 번역하든 아니면 어원 그대로 태어남이라고 번역하든, 그것과 흔히 대립하는 것은 정신, 문화, 초자연(초본성?) 같은 것이다. 정신과 문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기로는 생물체 가운데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리고 초자연은 신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정신이나 문화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이란 미상불 원숭이를 포함한 동물의 본성과 경계가 흐릿할지도 모른다. 흄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것은 공드리가 보기에 정신이나 문화였다. 결국 공드리가 이겼다, 고 말하는 내 머리는 뒤죽박죽이다. <휴먼 네이쳐>에서 가브리엘(미란다 오토)은 프랑스어 억양으로 영어를 한다. 그 프랑스어 억양은 매력의 포인트가 되기도 하지만, 주로는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빚는다. 외국어 억양이 매력 포인트이든 놀림감이든 그것은 문화다. 가브리엘의 프랑스어 억양에 촉발돼 네이선(팀 로빈스)의 욕정이 솟구칠 때, 그 욕정은 본성일까 문화일까? 망언다사(妄言多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