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6월6일은 당연한 말이지만 ‘현충일’이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 장병들에게 묵념하는 날. 조기를 게양하는 날. 국가적으로 많은 행사가 있는 날. 하지만 그건 1950년대 이후의 일이고, 1949년 6월6일은 현충일이 아니었다.
1949년 6월6일 새벽,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청사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에게 포위된다. 몇 시간 뒤 출근하던 반민특위 요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들 경찰에 무장해제된다. 그 과정에서 조사관을 비롯한 주요 요인들은 뒤뜰에 끌려가 무릎이 꿇리고, 특경대 요인들은 서울 시내 경찰서에 나눠져- 돌려가며-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된다.
친일 출신 경찰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 습격 사건이 있은 뒤 반민특위는 급격하게 와해된다. 사실상 친일파 청산은 물건너가고, 잡혀왔던 친일파 대부분이 무죄로 풀려난다. 1기 위원들이 전원 사퇴하자 새롭게 들어선 2기는 오히려 친일파들에게 사법적 면죄부를 공식적으로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반민특위에 열정적이었던 요인들은 이후 친일파들의 협박과 암살 위협을 피해 실업자 신세가 되어 거리를 전전하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반민특위는 요즘의 무슨무슨 위원회 같은 수준이 아니라 검찰과 법원 심지어 일부 경찰기능까지를 포괄한 엄청난 규모와 막강한 힘을 지녔던 ‘헌법 기관’. 즉 조사(특별 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하고, 기소(특별 검찰부/검찰관장 권승렬)하고, 재판(특별 재판부/재판부장 김병로)까지 할 수 있었던 사실상의 ‘특별 사법부’였다. 따라서 이날의 습격은 단지 반민특위에 대한 습격이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습격이기도 했다. 실제로 사건 발생 직후 반민특위 청사를 급하게 찾았던 권승렬 검찰총장은 경찰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다.
무엇보다 반민특위를 탄생시키고, 탄생된 반민특위가 근거를 두고 있던 곳이 다름 아닌 ‘국회’(반민특위는 별도로 국회에 설치됨). 우연히도(?) 6.6 사건을 전후로 발생한 ‘국회 프락치 사건’은 반민특위 탄생의 주역이었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회 프락치로 몰려 구속되는 계기가 되고, 이후 행정부에 맞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국회는 실종되고 만다.
결국 1949년 6월6일 발생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국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파 청산이 사실상 실패로 끝났음을 선고하는 날인 동시에 국민의 기대와 희망을 한몸에 받고 출발했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행정부의 독주로 치닫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날이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60년 4월19일, 경교장에 몰려든 약 3만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경찰은 총을 발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