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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공포가 맞닿은 관능의 시간
장영엽 2013-06-11

<호수의 이방인>의 알랭 기로디 감독

<호수의 이방인>은 이후의 전개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영화다. 서로의 몸을 음흉한 눈빛으로 훑으며 쾌락을 좇던 게이들의 낙원의 숲은, 그들이 노닐던 호숫가에 떠오른 한구의 시체로 인해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사랑과 섹슈얼리티, 두려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이 작은 사회를 간결하고 힘있는 이미지를 통해 포착해낸 프랑스 감독 알랭 기로디의 시선은 전작 <도주왕>보다 한층 성숙해졌다. 프랑스 영화계의 촉망받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출발해 중견이 된 지금도 여전히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을 선사하길 멈추지 않는 알랭 기로디를 칸에서 만났다.

-당신은 <호수의 이방인>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준 건 시나리오이지만, 작품을 다 쓰고 났을 때 내가 바타유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몇년 전 우연히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라는 그의 말을 접하게 되었다. 그 말이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구상할 때 어떤 요소를 먼저 떠올렸나. 캐릭터인가, 장소인가, 어떤 특정 이미지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나. =시나리오 작업을 뒤돌아보는 과정은 언제나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면 캐릭터나 장소, 이미지 등 모든 요소들이 한순간 밀려오고 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시작부터 숲과 호수를 배경으로 해야겠다는 명확한 생각이 있었고, 세명의 남자주인공도 초기 단계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욕망, 환상과 두려움을 조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테마는 당신이 전작 <도주왕>을 통해 이미 다루었다. 두 영화의 연관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호수의 이방인>은 <도주왕>에 대한 내 대답이다. 하지만 <도주왕>과는 정반대되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욕망과 열정에 대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호수의 이방인>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알다시피 <도주왕>은 중년의 게이가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건 가능성이 없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 내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자신있게 표현할 수 없거나 확신이 없는 대목에서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거나 유머나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연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더라. 그래서 <호수의 이방인>을 연출하면서는 정말로 내가 잘 아는 세계, 즉 게이 커뮤니티를 정면으로 응시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여전히 인물 사이의 유머러스한 요소는 유지하되 관계의 어두운 측면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호수의 이방인>은 게이들이 섹스 파트너를 찾는 숲과 호수에서 거의 모든 순간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고립된 장소를 영화의 배경으로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묘사한 숲속 사회가 고립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곳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성적 해방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순수하게 성적 욕망을 즐기는 커뮤니티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영화의 설정상 제한된 장소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이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나체로 숲속을 걸어다니거나 일광욕을 즐긴다.-편집자).

-영화의 구조가 흥미롭다. 주인공 프랭크가 같은 장소에 도착하고 같은 숲을 거닐며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이 되풀이된다. 특정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줬을 때, 당신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한참 생각하다가) 좋은 질문이다. 나에게 일상적인 장면을 반복하며 재구성하는 건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점이었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숲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자 미셸을 바라보는 장면을 말해보자. 처음에 프랭크가 미셸을 바라보는 시선은 음흉하다. 하지만 여러 사건이 벌어지며 미셸을 보는 그의 눈빛은 점점 고뇌에 찬 모습으로 변화한다. 반복은 이러한 차이를 느낄수 있는 중요한 구조다.

<호수의 이방인>

-숲을 찾아오는 모든 게이들이 성을 탐닉한다. 하지만 그들과 멀리 떨어진 채 늘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는 앙리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과 좀 다른 것 같다. 그에게는 욕망이 없어 보인다. 앙리는 섹스를 욕망하지도 않고, 무기력하게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그에게도 열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열망이 아닐 뿐이다. 그는 다른 유형의 열망을 좇는다. 앙리에겐 섹슈얼리티보다 우정이 더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그는 성적인 클라이맥스가 부질없다는 걸 알고 있다. 성적인 욕구는 정점에 달한 뒤 소진되어 버린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앙리는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피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 가치를 좇는 인간도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호수에서 살인이 일어난 뒤 갑작스럽게 영화에 등장한 수사관이 숲속의 게이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왜 서로를 탐하면서도 타인의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느냐고. 무려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말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게이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호수의 이방인> 속 경관의 대사를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당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무방한가. =그것은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메시지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물론 내 자신의 경험을 영화 속 캐릭터에 반영해왔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다른 사람의 일을 신경쓰지 않기로는 게이 커뮤니티나 지금의 사회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연이다. 당신이 포착한 숲과 호수의 풍경은 마치 하나의 캐릭터 같다. 이러한 자연으로부터 어떤 감각을 포착하길 원했나. =나는 영화감독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센추얼리스트(관능주의자)라고 본다. 관능주의는 대개 인간의 몸이나 자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내가 많은 작품에서 농부 같은 전원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자연을 주의깊게 조명하는 건 이러한 내 정체성과 관련있다. 내게 숲과 호수는 그 자체로 시적이고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원하는 모든 요소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까.

-자연을 하루 중 어떤 시간에 담아내느냐도 이 영화엔 중요했던 것 같다. 해질녘의 숲은 관능적인 낮의 숲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황혼의 순간은 매직 아워다. 매우 짧게 지속되어 촬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 시간만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내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사랑과 공포가 공존하는 이 작품에서 해질녘의 숲을 조명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인간에게 공포가 찾아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낮 동안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나눈 이라도 밤이 되면 결국 온전히 자기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프랭크가 숲을 헤매는 마지막 장면에서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연인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프랭크의 상황은 매우 복합적인 감흥을 준다. 이 결말은 처음부터 생각했었나. =이건 시나리오에 있던 버전이 아니었다. 나는 애초의 구상보다 더욱 비극적이고 비장하게 이 영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지금의 결말을 생각하게 됐다. 사랑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엔딩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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