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헝헝~. 푸하핫~. 왕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김수현은 인터뷰 내내 참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김수현에게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동구의 모습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제가 바보 같다는 말인 거죠?”라며 또 웃었다. 달동네 바보 동구로 위장해 살아가는 남파간첩 원류환. 김수현이 스스로 선택한 임무였다. 얘기를 나눌수록 김수현은 엘리트 간첩으로 살았던 때보다 동네 바보로 살았던 시간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된 액션연습과 혹독한 한겨울의 촬영이 김수현을 거세게 몰아붙여서였을까. 오기와 끈기로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던 시간들을 김수현은 웃음에 실어 날려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문득 김수현에게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 <드림하이> <해를 품은 달>, 영화 <도둑들> 이후 인기에 취해 있는 대신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데 몰두했던 김수현을 만나 은밀하게 물었다. 당신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요.
-<은밀하게 위대하게> 촬영이 끝나고 학교(중앙대학교 연극학과)로 돌아갔다. 한창 바쁘게 다음 작품을 준비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 =2년 만에 복학했고, 이제 2학년이다. 작품은 계속 보고 있다. 일과 학업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연기도 하고 공부도 할 거다.
-첫 주연 영화의 개봉을 앞둔 심정은 어떤가. =<도둑들>을 할 때는 선배님들이 워낙 굉장해서 그 옆에서 긴장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히 편했다. 숟가락 들고 선배님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언어를 배울 때도 그렇지 않나. 처음엔 어려운 줄 모르고 재밌게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렵고 힘이 든다. 지금이 딱 그렇다. (연기를) 조금 알아서 고민이 많은 그런 상태.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망설임 없이 선택한 작품인가. =웹툰을 재밌게 봤다.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봤는데, 처음엔 하하호호 웃다가 뒤로 가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감동에, 충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그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그랬다. 또 북한 최고 엘리트요원의 각 잡힌 모습, 조장으로서의 눈빛, 고난도 액션, 이북 사투리 같은 숙제들이 주어졌다. 수행할 것이 많아서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시기에 도전하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해서 망설임 없이 나를 던졌다.
-본격적인 몸개그는 이번이 처음이다. =동네 바보 역할이었으니까. 동네 바보를 소화하면서 목표로 잡았던 건 정말 ‘편한’ 바보가 되자는 거였다. 무서운 바보도 많고 부담스러운 바보도 많잖나. 관객이 동구를 무서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면 안될 것 같아서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몸에 힘도 뺐다. (연체동물 흉내를 내며) 이렇게 툭 밀치면 밀쳐지고, 당기면 당겨지는. 자연스럽게 내 몸이 반응만 하면 되니까 몸개그도 편하게 했다.
-영화 초반 동구의 모습은 웹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웹툰이 연기 참고서가 되기도 했나. =캐릭터에 대한 정답은 모두 만화책에 있었다. 하지만 이미 웹툰을 본 수많은 독자들이 있지 않나. 혹시 내 연기에 반감이나 거부감을 가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스스로를 믿고 도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 초반, 물구나무서서 팔굽혀펴기하는 장면은 얼마나 연습한 건가. =두달 정도 걸렸다. 팔굽혀펴기가 문제가 아니라 볼거리가 있는 몸을 만드는 게 일이었다. 오전에 운동하고 오후에 촬영하고 촬영 끝나면 또 운동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동시에 풀만 뜯었다. 김치찌개 같은 빨간 음식이 먹고 싶어서 혼났다. 그렇게 두달 동안 생활하니 빠진 건지 야윈 건지 모르는 상태가 됐다. 스크린으로 내 모습을 보면서는 좀 민망했다. 흉터 분장도 하고 살을 많이 빼다보니 여느 누구들처럼 부피감이 없어 아쉽기도 했고.
-기술적으로 연마할 게 많으면 정작 감정 연기를 할 때 애먹는 순간도 생길 것 같다. =영화 막바지, 공사장 옥상 장면 촬영할 때가 특히 힘들었다. 전주 세트장에서 찍었는데, 날씨도 춥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비까지 맞으면서 연기를 해야 했다. 비가 살갗에 닿아서 젖으면 몸이 막 아린다. 또 몸이 경직되고 이상하게 구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상태로 액션도 해야 하고 감정연기도 해야 했다. 그땐 도망가고 싶었다. (웃음) 그래도 촬영 시작 전 매번 감독님과 선배님들이 다같이 모여서 으쌰으쌰 파이팅을 했다. 촬영장의 98%가 남자라서 가능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드림하이> 때는 톱아이돌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고, <도둑들> 때는 톱배우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고, <해를 품은 달> 때는 스스로 한계를 느낀 적이 많았다고 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하면서도 주눅이 들거나 한계를 느낀 때가 있었나. =굳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바보 캐릭터 덕분에 그나마 마음 편하게 연기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해야 할 것들, 내 임무를 미리 이만큼 준비한 다음 현장에서 내가 준비한 카드들을 하나씩 꺼내놓으면서 연기했다. <해를 품은 달>을 하면서 느낀 건데, 그런 식으로 하니 어느 순간 내가 연습한 것들에 갇히게 되더라. 이번엔 마음을 조금 열었다. 조금 더 귀를 열고, 눈을 뜨고, 피부로 느껴가면서 연기했다.
-장철수 감독은 캐스팅한 이유로 ‘잠재력과 야심을 가진 배우를 원했고 정답은 김수현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 본인의 야심을 많이 풀어놓은 것 같나. =분명 연기에 대한 야심은 푼 것 같은데… 뒷부분이 아쉽다.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계속 주의를 빼앗겼다. (옥상 액션 신에서) 나는 몸을 이렇게 쓰고 싶은데 부들부들 떨기 바빴다. 몸이 너무 아려서 뜻대로 연기가 안됐다. 스스로에게 분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분할 땐 어떻게 하나. =마음을 다스려주는 도구를 찾는다. (웃음) 그리고 한번만 더 다시 가자고, 내일 또 찍자고 그랬다. 고맙게도 감독님이 잘 받아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행동들은 좀 진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나. =학교생활에 정신이 많이 팔려 있다. 기말고사가 6월 중순이다. 연극학과라 거의 발표 위주로 시험이 치러진다. 내가 연극학과 51기인데 벌써 55기까지 들어왔다. 후배들 앞에서 연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막 생긴다. (웃음) 아, 이런 얘기 할 게 아니지. 야심이라 한다면, 아직까지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마무리가 안된 상태이니 내 야심을 열심히 영화 홍보하는 데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