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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분해와 조립
김혜리 2013-05-31

* 4월27일 일기에 <아이언맨3> 결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셰임>, 그리고 이탈리아 화가 아고스티노 카라치의 <피에타>. 마이클 파스빈더가 벗은 몸을 시트로 감고 천장을 응시하는 <셰임>의 첫숏은 몇초 동안 정사진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시트도 마침 성모 마리아의 색인 푸른색이라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그린 서구 종교화가 즉각 떠오른다. 파스빈더는 예수라고 해도, 옆 십자가에 못박힌 죄인이라고 해도 납득이 되는 멋진 얼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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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 화장실에서 극장 직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이번 주말 흥행몰이가 예상되는 <아이언맨3> 개봉을 앞두고 두명의 스탭은 마치 지평선에서 다가오는 토네이도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심경인 듯했다. 한편 다른 한명은 매점에 오징어 굽는 기계가 들어올까봐 걱정스러워 했다. 오징어구이는 나 역시 반대라고 하마터면 끼어들 뻔했다. 누가 뭐래도 구운 건어물 냄새는 몰입에 해롭다고 확신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생 중 상당량의 시간을 보낸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절반만 알고 있다. 스크린과 카운터 뒤쪽 세계는 여전히 내게 미지의 영역이다. 객석의 분실물은 어떻게 주인을 찾아가고 분리수거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팝콘은 하루에 몇 부대나 튀겨지고 3D 안경은 어떻게 닦아 정리하는지 알지 못한다. 앵글로 치자면 영사실에서 내려다보는 극장의 인상이 궁금하고, 박스오피스 창구에서 접하는 이제부터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고 싶다. 문득 읽으면서 부러웠던 에세이들이 생각났다. 알랭 드 보통은 허가를 받아 공항에 상주하고, 물류센터와 과자 공장 등을 방문하여 <일의 기쁨과 슬픔>과 <공항에서 일주일을-히드로 다이어리>를 썼다. 우리가 알고는 있으되 진짜로 알진 못하는 장소들을 노동의 현장으로서 들여다보고 그들을 매일 탈없이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을 관찰한 에세이였다. 앞선 비슷한 예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읽은 일련의 공장 견학기가 있었다. 인체모형, 가발 등이 제조되는 과정을 정리하는 데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울인 주의력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두 작가의 글은, 기계를 사용하지만 그 내막은 정확히 모르는 ‘인문계’ 인간들이 평생 안고 사는 막연한 불안을 이기는 한 방도로 보여 귀여운 구석이 있다. 언젠가 내게도 영화관의 24시간 신진대사를 내부에서 구경하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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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슈퍼 히어로 군단 가운데 힘의 근원을 초자연에 두지 않은 대표적 영웅은 배트맨과 아이언맨이다. 둘의 힘은 신체와 분리할 수 있는 일종의 자산이고 그래서 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사회 정치적 변수가 더 많이 작용한다. 군수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2대째 재벌인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영웅으로서의 활동을 공개된 인생과 분리한 사색가 배트맨과 스타일이 딴판이다. 토니는 많이 벌고 많이 기여하면 된다는 주의다. 실용적인 그는 살상 무기를 아예 없애는 대신 최고의 무기를 개발해 악을 제압하려 한다. 이때 결정적 질문은 이 극강의 군사력을 누구의 제어 아래 두느냐인데, <아이언맨> 1, 2편은 부패할 게 뻔한 국가나 공공조직보다 선의를 가진 개인(토니 스타크)이 힘을 독점하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고 암시한다. 요컨대 다수의 합의보다 우월하고 선량한 개인의 의지에 기대를 거는 셈이다. 국내 박스오피스에서 <아이언맨> 연작이 거둔 성공은, 마침 일련의 TV드라마가 재벌과 왕을 문제 해결 능력과 도덕성, 로맨틱함을 한몸에 갖춘 이상적 히어로로 조명하는 유행과 맞물리기도 했다.

요컨대 코믹스 문외한이 영화로 처음 만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는 정치적으로 아슬아슬한 영웅이었다. 그런데 셰인 블랙 감독과 드루 피어스 작가가 쓴 <아이언맨3> 시나리오는 영리하게도 슈퍼 히어로 토니 스타크의 초점을 셀레브리티 재벌에서 ‘호모 파베르’- 공작(工作)하는 인간- 로 옮겨놓았다. <어벤져스>에서 죽다 살아난 경험이 남긴 정신적 외상에 토니 스타크가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한 슈트를 끝없이 발명하는 일이다. 그는 위기에 처하면 고뇌하기보다 움직이고 만드는 인간이다. 한 플롯이 완결되기 전에 다른 플롯이 시동을 거는 민첩한 전개 방식도, 동시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토니 스타크의 성격과 딱 달라붙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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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3>는 토니 스타크와 슈트를 떨어뜨려놓은 상태로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가는 데다가, 조종자 없이 독자적으로 전투하는 슈트를 대거 등장시킨다. 재미를 다변화하는 장점은 있겠지만 ‘기계와 일체가 된 엔지니어’라는 아이언맨의 근본적 정체성을 흔드는 이 결단은 확실히 도박이다. 슈트들이 알아서 움직이면 <트랜스포머>의 미니 버전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언맨3>의 대차대조표는 결론적으로 흑자다. 소소한 반전과 위트를 잃지 않은 시나리오가 최고의 수훈갑이지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도 있다. 그가 창조한 토니 스타크는 히어로의 복장을 입지 않았을 때 맨 얼굴이 더 매력적이라는 점에서 희귀한 슈퍼 영웅이다. 적어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은 빨리 변신하라고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언맨3>가 시리즈를 일단락 짓는 에피소드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만큼 대담한 설정이 가능했을까 싶다. 40기의 슈트가 한꺼번에 원군으로 날아오는 <아이언맨3>의 클라이맥스는, 글자 그대로 위기를 한방에 해소하는 기계신(그 유명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강림이다. 뒤집어 말하면 맥 빠지는 물량공세 해결책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장면이 찜찜한 뒷맛을 남기지 않는 건, 이들을 몽땅 날려버리는 자폭의 피날레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시리즈 전체를 지탱한 물신숭배의 대상을 화약으로 탕진해버리는 이 불꽃놀이는 나의 머릿속을 그냥 하얗게 만들어버렸다. 뒷감당이고 뭐고 생각지 않는 영화의 강력한 한방에, 입 다물고 일단 다음 행보를 지켜보자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만약 선수를 쳐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요량이었다면 셰인 블랙 감독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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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작가의 원작 소설을 읽지 못한 내가 <고령화가족>의 제목에 끌린 이유는, 세태를 보여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제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중년에 접어들고도 부모가 지어놓은 가족의 고치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거론된 지 꽤 오래인데 거기 착안한 대중영화는 본 기억이 없었다. 장성해 독립한 자녀들이 우여곡절 끝에 홀어머니의 둥지에 다시 몸을 의탁하는 도입부는 재미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철들지 못한 세 남매의 사연도 궁금해졌고 ‘집구석’이라는 우리말 표현의 냄새를 생생히 전하는 몇몇 장면도 징했다. 그런데 이 콩가루 가족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거북해졌다. 단결이 싫어서는 아니다. <고령화가족>은 중반 이후 인물들의 혈연이 100%가 아니라는 점에 무게를 둔다. 그리고 피가 일치하지 않아도 한지붕 아래 자고 함께 끼니를 먹는 관계가 가족의 요체라고 말한다. 그들은 밖으로부터 크고 작은 위협이 닥치자 지금까지 보아온 숱한 한국영화의 피로 맺어진 가족 못지않게 똘똘 뭉쳐 싸우고 순교에 가까운 희생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내가 불편했던 이른바 가족 이기주의의 실체는 혈연 제일주의가 아니라 패거리주의였음을 깨달았다. 같은 피를 나눴느냐 대안가족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무서운 것은 자신과 한 무리에 속한 이가 ‘남’에게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은 용납 못하는 격렬한 집단 방어 심리였다. 평소엔 무관심하다가도 남과 싸울 경우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은 누구에게나 든든한 보루일 것이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아무 일 없는 평소에 서로 강한 개인이 될 수 있도록 돌봐주고 위기는 그냥 각자 극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꼭 1인 가구 세대주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가족은 아름다운 단위지만 가족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못 사는 세상도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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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3>의 더미와 자비스

토니 스타크에게는 얼굴 없는 두 조력자가 있다. 하나는 저택 지하의 작업장에서 심부름을 맡는 기계팔 더미(DUM-E). 이름은 월Ⓔ 친척뻘이지만 실수투성이 허당이다. 주요한 극적 기능은 토니의 구박을 받고 쩔쩔매는 제스처로 관객의 미소를 자아내는 것. 더미가 말 못하는 조수라면 인공지능 프로그램 자비스(폴 베타니)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보통의 영화 속 인공지능 캐릭터에 비해 덜 냉철하고 능청스러운 점이 주인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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