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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날이 다시 오면
이영진 2013-05-20

“오빠는 버스, 지하철처럼 밀폐된 공간에만 들어갔다 하면, 예전 안기부 조사받던 남산 대공분실이 연상되면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쥐어뜯는 것 같고 머리가 터질 것 같으면서 심한 설사가 쏟아지고 구토를 하여 십여년간 이 일로 인해 가족들이 받은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승일 감독의 여동생인 전승아씨가 쓴 탄원서의 일부다. 전승일 감독을 모른다. 만난 적이 없다. 십여년 전, 영화인들이 보내온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후보 추천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한 것이 전부다. 독립다큐멘터리에 김동원이 있다면, 독립애니메이션엔 전승일이 있구나. 수학공식처럼 그렇게만 외워뒀던 것 같다.

이름만 알고, 얼굴은 모르는 전승일 감독이 몇달 전 <씨네21>에 두툼한 우편물을 보내왔다. 2월13일이었다. 전 편집장에게서 건네받은 서류 봉투 안에는 탄원서 외에도 갖가지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국립법무병원의 정신감정 결과 통보문이 있었고, 경희의료원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서가 있었다.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도 동봉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감옥으로부터 날아든 편지였음에 놀랐다. 전승일 감독은 왜 철창에 갇혀 있는 것일까. 그를 알 만한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이는 없었다. 동생인 전승아씨에게 연락을 취해봤으나, “출장 중이라” 통화를 할 수 없었다.

4374. 그의 가슴에 나붙었던 수인번호였던 모양이다. 공식 문서 외에도 전승일 감독이 직접 쓰고 그린 몇장의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중 검은색 볼펜과 빨간색 볼펜으로 ‘4374’라고 꾹꾹 눌러 쓴 A4용지가 눈에 먼저 띄었다. 또 한장의 메모 용지에는 이렇게도 적혀 있었다. “2012년의 마지막 3일을 보호실(격리독방)에 갇혀 있었고, 그중 첫날은 새벽 5시부터 무려 16시간 동안 팔, 다리, 가슴까지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다. 안경도 빼앗긴 채….” 국가폭력으로 인한 지난 10여년 동안의 고통에 대한 그의 절절한 호소를 읽고 나서 다시 보니 ‘4374’라는 숫자가 어떤 끔찍한 그림처럼 보였다. 4자가 총부리이거나 단검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두개의 4자 사이에 놓인 3자와 7자는?

“고문을 만드는 사회도 반문명 국가이지만, 이미 드러난 고문 피해자를 위해 치유와 배상의 가능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는 더욱 반문명적인 사회이다.” 전승일 감독이 되풀이해 읽고 있다는 박원순 서울 시장의 <야만시대의 기록>(2006) 중 한 문장이다. 야만시대는 그러나 과거의 악몽이 아니라 아직까지 지속되는 현실이다. 한 아이돌 멤버가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약속이라도 한듯이 보수 언론에선 “광주폭동 때 머리 좀 긴 애들은 다 북한 전투원”이라고 화답한다. 5월18일이다. 깃발 없는 진압군이 보이고, 탱크들의 행진 소리가 들린다. 오월 그날이 왔지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누군가의 트라우마가 집단 망각의 결과라면, 붉은 꽃은 심어도 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