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왜 백혈병에 걸렸는지, 어째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는지 밝혀낼게. 아빠가 꼭 약속 지킬게.” 이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우리 앞에 있다. 어디서 바람이 분다. 젖은 손을 바람이 핥고 간다. 말라가는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생각한다. ‘국가’라는 단위의 공동체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있을 때, 그 억울함은 누가 풀어줘야 하는 것일까. 가장 좋은 것은 억울한 죽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발생했다면 최선을 다해 해원해야 한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위해,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것이 피를 나눈 친족뿐이라면 그것은 원시사회다. 혹은 혈통 공동체가 중심인 중세 봉건사회이거나. 현대사회는 억울함을 조율하기 위해 보다 합리적인 합의시스템을 활용한다. 법과 언론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해 공공성을 부여받는다. 회자되는 저 엄숙한 ‘법정신’과 ‘언론정신’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보살피라는 사회적 책무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이유는 단죄가 목적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죄로 인해 발생하는 억울한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일 터. 그런데 지금 여기의 사정은 어떠한가.
속초의 택시기사 황상기씨.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 황유미씨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반도체 회사에 보내고 자랑스러워했다. 그 딸이 2년 만에 백혈병에 걸려 돌아왔다. 아버지는 딸이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딸과 같은 병을 얻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도. 병마와 싸우던 딸은 결국 병원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택시 뒷좌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딸의 나이 21살.
이 ‘사건’ 앞에 오로지 피를 나눈 아버지만이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다윗 vs 골리앗’의 처절한 싸움을 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이 기나긴 사투의 기록인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촬영현장에서 노종면 전 YTN 기자이자 앵커가 뉴스를 진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민 기금으로 제작비를 만들고 있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해 앵커 역을 한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이 촬영 뒤 전한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언론이 심층적으로 다뤄야 할 사건임에도 언론은 그러지 못했다. 언론의 역할을 영화인들이 하고 있다고 본다”며 안타까워하는 그의 목소리.
본래 있어야 할 방송국에서 부당하게 쫓겨나 방송국 바깥에서 카메오 앵커 출연을 하는 앵커. 그가 영화에서 전한 뉴스는,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그 회사의 회장은 정권으로부터 이례적인 특별사면을 받는 대목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