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울분과 하소연이 엄청난 공감을 이루고 있다. 오죽하면 갑인 대기업과의 계약을 을들을 죽이는 ‘을사늑약’이라고까지 일컬을까. 약탈적 부당 거래와 횡포는 전 업종에 걸쳐 있다. 계약•거래에서 갑을관계는 어찌 보면 필연이다. 문제는 이것이 인격의 영역까지 침범한다는 것이다. 빵 회장과 라면 상무 사례에서 보듯 ‘갑의 지위’를 악용하는 ‘진상 갑’들은 허다하다. 남양유업 사태도 단지 물량 떠넘기기나 삥 뜯기만이 아니라 본사 영업책임자가 대리점주들에게 인격 모욕을 수시로 해댔기 때문에 불거졌다. 영업책임자는 윗분 핑계를 댈 테고, 윗분은 더 윗분, 더 윗분은 오너 핑계를 대겠지.
얼마 전 동네 상가에서 목격한 일이다. 한 가게가 망하고 다른 가게가 들어설 즈음 집기들을 철거하느라 먼지와 굉음이 그치지 않았다. 마침 아래층 커피집에 “중요한 분을 모시고 온” 손님이 “대화가 되지 않는데 커피를 판다”며 커피집 사장에게 따졌다. 사장은 관리소에 항의했고, 관리소 직원은 철거일꾼에게 법적 처벌 운운했다. 일꾼은 지나가던 ‘청소 아줌마’가 철거도구를 밟았다고 시비를 걸었다. 이 와중에 세 받아먹는 상가 주인은 나 몰라라 했겠지. 철거 사실을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일은 그 상가 주인이 할 일이다.
지난 임시국회에서 가맹사업법안,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법안 등이 처리되지 못했다. 서두를 일이나 과연 법만 바꾸면 될까. 직장인의 80%가 스스로를 을이라 여긴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이 먹이사슬 어딘가에서 이쪽으로는 을일지라도 저쪽으로는 갑일 수 있는 생태계를 살아내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을이거나 을일 수 있다는 것 못지않게 우리 모두 조금씩은 갑이라는 사실을 먼저 주시했으면 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 과장된 설정에도 매력적인 건, 을의 피해의식에 앞서 갑의 책임감을 지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