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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세상의 종말보다 더 끔찍한 것
신형철 2013-05-15

불안의 영화 <테이크 쉘터>가 선택한 결말에 대한 한 생각

* 아래 글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돼 있습니다.

* 아래 글은 <씨네21> 904호 지면에 게재된 원고의 후반부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맞다. <테이크 쉘터>(Take Shelter, 2011)도 세상의 종말을 근심하는 영화다. 부쩍 이런 영화가 많아졌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작년에 먼저 개봉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 분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혹시 이 훌륭한 영화가 <멜랑콜리아>와 비슷할 것이라 짐작해서 보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러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야 하겠다. 서사의 뼈대가 유사해도 그것이 산출하는 정동(情動, affect)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멜랑콜리아>의 정동이 ‘우울’이라면, <테이크 쉘터>의 그것은 ‘불안’이다. 우울과 불안이 다른 정도만큼 두 영화는 다르다. 물론 이 말은 이 글의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어야 한다.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불안의 영화 <테이크 쉘터>는 ‘무엇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이 물음과 관련해 한 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으며 그 답도 분명히 제시했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결말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마침표로 보인다.

망상과 계시 사이에서

굴착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35세의 남자 커티스(마이클 섀넌)는 사만다(제시카 차스테인)의 남편이자 해나(토바 스튜어트)의 아빠다. 딸 해나의 청각 장애가 이 부부의 근심거리이긴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이만하면 행복한 가정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커티스는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외상(trauma)으로 인한 악몽의 특징은 동일한 정황의 꿈이 집요하게 반복된다는 것인데, 그와 달리 커티스가 꾸는 악몽은 회를 거듭할수록 상황이 더 끔찍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악몽은 마치 어떤 최종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 악몽은 커티스에게 무언가를 (이를테면 세상의 종말을) 계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한밤의 악몽뿐이라면 수면제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 느낀 육체적 고통이 꿈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다가, 환각과 환청까지 가세해 낮의 일상까지 엉망이 되고 있으니, 커티스와 함께 관객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커티스는 그저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의 노아처럼 세상의 종말을 미리 고지 받는 중인 것인가.

커티스 자신도 둘 중 어느 쪽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정신 상담 및 약물 치료를 시도하고, 동시에, 악몽이 신의 계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그간 방치된 방공호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원인불명의 불안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터라 그는 애초 타인의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결국 지역?직장 공동체에서 고립되고 만다. 그를 품어주는 사람은 아내 사만다뿐이지만 그녀라고 남편의 불안을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오직 사랑의 힘으로 자기 몫의 고통을 견뎌나간다. 어느 날 밤, 마침내 심판의 날이 온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고, 이 가족은 방공호로 대피해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커티스는 극도의 불안을 느끼며 바깥으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사만다는 지금 이 순간 커티스가 직접 방공호의 문을 열도록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 영화의 서사적 절정에 해당하는 순간, 즉 모든 것이 ‘망상’인지 ‘계시’인지를 마침내 확인해야 할 그 순간을 맞아, 커티스는 힘껏 방공호의 문을 열어젖힌다. 결론은?

세상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한밤의 폭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제 커티스는 자신의 악몽, 환각, 환청이 단지 망상이었을 뿐 그 무슨 계시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문가의 입원치료 명령을 거부할 명분도 이제는 없다. 입원 전에 떠난 마지막 가족 여행의 풍경이 이 영화의 종장(終章)을 이룬다. 이렇게 이 영화는 끝나려는가. 그런데, 바로 그때, 바다 저편에서 거대한 폭풍우가 밀려오고 악몽 속의 그 갈색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커티스 혼자가 아니다. 딸 해나와 아내 사만다도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지 않은가. 역시 모든 것은 계시였던 것일까. 뒤엉켜버린 머릿속을 우리가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가차 없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영화는 끝나버린다. “근래 가장 고민스런 대단원”(김혜리 <씨네21> 20자평)이라는 토로를 이끌어낸 이 마무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영화를 어떤 각도에서 읽건 그 독법이 이 당혹스러운 결말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끌어안지 못한다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불안의 영화’라고 명명하고 이것이 과연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를 물었다. 다음 언급은 그 물음에 대한 유력한 답 하나를 소개한다. “<테이크 쉘터>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미국의 평자들은 이 영화를 미국 중산층의 위기와 병적인 불안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했다. 대출금도 갚지 않은 집을 담보로 방공호를 짓고, 닥쳐올 위험에 대한 불안을 안고 버둥거리는 커티스의 모습은 분명 미국사회를 강타했던 경제 위기의 일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공포는 미국 바깥의 우리에게도 매우 가까운 현실감을 준다. 제프 니콜스 감독은 사소한 일상의 흔들림이 숨통을 조여오는 전 과정을 차분히 주시하며, 결국 묵시록적인 메시지까지 설득해낸다.”(김효선, <씨네21> 900호) 덧붙여 이 영화가 묘사하는 재앙은 경제적 파탄의 은유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불안은 '중산층에서 빈민층으로의 추락 가능성이 초래하는 불안' 정도로 읽는 것이 온당하다는 시각은 다른 지면에서도 자주 눈에 띈다. 이런 식의 독법은 언제나 조금씩은 맞지만, 그래서 언제나 충분히 맞지는 않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이런 정리를 시도해본 것은 이 세 작업의 몫을 혼동하거나 작업의 단계를 무시하는 사례들이 더러 있어서다. 예컨대 밝혀지지 않은 사실 관계 앞에서 고된 실증 작업을 생략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공백을 메우거나(주석을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 지난한 해석의 노동을 건너뛰고 신속히 텍스트를 분류한 다음 그것으로 해석이 완료됐다고 믿거나(해석을 배치로 대체하는 경우)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금융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다룬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 텍스트를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도록 신속히 ‘배치’해버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한 사례는 아직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무 것도 뒤집지 않은, 반전

커티스의 불안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들은 여러 곳에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유년기 체험일 것이다. 커티스가 10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커티스를 마트 주차장에 내버려 둔 채 갑자기 사라졌고, 1주일 후 발견된 그녀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커티스의 아버지는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이후 커티스는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의지하며 성장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에게서 아들로 분열증적 기질이 유전되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체험이 어린 커티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가 하는 물음이다. 어머니에게 분열증 증상이 나타난 것은 무책임한 남편 대신 아들 형제를 홀로 키우다 더 이상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무책임했던 남편이 아들 형제에게 훌륭한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린 커티스는 자주 불행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와해되는 일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신이 누군가의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 있을 미래에 대해서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나 커티스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이는 그가 이제 가족 구성원에게 상처를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러 번 다짐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혀 병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낙관적 다짐(‘되어야 한다!’)이 강박적 불안(‘될 수 있을까?’)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은 병리적이다. 계기는 무엇인가. 커티스의 딸 해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부터 청각 장애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리고 부친이 최근에 돌아가셨다는 것(“지난 4월”). 그의 삶에 생긴 이 두 가지 변화가 그간 잠복해 있던 25년 전의 충격과 상처를 다시 활성화시킨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분열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지금 자신의 나이 무렵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비슷한 불행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헤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결연하게 각오를 할수록 그의 불안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커티스가 자신의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두 가지 모순되는 행동을 동시에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그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정신의학 분야의 전문서적을 탐독하고 상담사를 정기적으로 찾는다. 또 그는 세상은 미쳤지만 자신만은 예외라는 듯이 묵묵히 노아의 방주를 만들기도 한다. 미친 것은 그인가 세상인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미쳤는지 세상이 미쳤는지를 확정하는 일이 아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단지 가족일 뿐이다. 자신의 분열증이 극심해져서 어머니처럼 격리 수용된다면 그로 인해 가족과 헤어져야 할 테니 문제이고, 자기가 아니라 세상이 미친 게 맞아서 실제로 ‘그날’이 오면 그로 인해 가족들이 죽게 될 테니 그것도 문제다. 두 경우 모두 가족의 파괴라는 결과에 이를 것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건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대책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그의 노력은 저 유일한 목적의 두 가지 수단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는 것은 아내 사만다다. 두 개의 사례를 들자. 라이온스 클럽 지역 모임에서 친구 듀워트와 시비가 붙자 커티스는 처음으로 자제력을 잃고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태풍이 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예언자의 포효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다 지친 이의 울분에 가까운 말이다. 그야말로 외톨이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커티스를 사만다는 말없이 안아주고 남편은 아이처럼 운다. 그리고 방공호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바깥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커티스가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무력하게 반복할 때, 사만다는 그녀 스스로 문을 열고 커티스를 끌어내지 않고, 남편이 자신의 불안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그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 커티스의 불안이 ‘가족에 대한’ 것이므로 이 상황은 오직 ‘가족을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만다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상투적인 의미에서 감동적인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장면들은 충분히 감동적이며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 결말에 대해 말하자. 결국 모든 것이 커티스의 불안 망상인 것으로 판명이 되고, 그제야 찾아간 정신과 전문의는 커티스에게 가족을 떠나 입원 치료를 받으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커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는다. “당신의 말은 제가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뜻입니까?”(You mean I have to leave my family?) 이 반문은 커티스의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대로, 관객인 우리가 궁금해 하는 물음(망상인가 계시인가)은 커티스 자신에게는 중요하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그가 며칠 뒤에 장기 입원을 해야 한다는 것은 며칠 전에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전자가 더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종말의 순간에는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세상은 차라리 멸망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그 길을 간다. 결말의 반전은 커티스의 바람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최후의 폭풍우는 이 영화의 유일한 실제 재앙인 것이 아니라 커티스의 마지막 망상이 아닌가. 그래서일 것이다. 휴가철의 해변에 이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은.

타인의 불행을 해석한다는 것

결국 또 나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쓰고 말았다.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이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해지는 데 더 많은 재능을 타고 났다는 사실을 착잡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문명 속의 불만>, 1930, 2장)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본 영화들만을 생각해 봐도 <아무르>는 육체 때문에, <파이 이야기>는 세계 때문에, <더 헌트>는 타인 때문에 불행해진 인간들을 그렸다고 할 만하다. 이런 식이니까 비평적 글쓰기라는 것은 많은 경우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 난감한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불행의 해석학’이 갖추어야 할 ‘해석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결혼을 한 뒤 과연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싹텄고,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담아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커티스는 당시의 나다.”(‘위기의 중산층’, <씨네21> 831호) 제프 니콜스 감독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으니, ‘금융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표현한 영화’라는 일각의 지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과 함께 하나의 텍스트는 너무 빨리 보편화되고 만다. 앞에서 사용한 개념을 다시 가져오자면,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理想)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트가 타인의 불행을 다룬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 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부기 : 이 영화에 자막을 입힌 분은 몇몇 대사를 자유롭게 의역했다. 두 개의 사례만 지적하자. 듀워트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늦게 귀가해서 커티스는 잠들어 있는 해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때 커티스가 아내에게 하는 말은 이렇다. “난 아직도 그녀[해나]가 깰까봐 신발을 벗어.”(I still take off my boots not to wake her.” 내가 제대로 메모한 것이 맞는다면 자막에는 이렇게 나왔다. “해나가 이렇게 된 것이 믿기지가 않아.” 그리고 영화 중반부에 심야의 도로를 달리다가 천둥과 번개가 치자 커티스는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걸 보고 있는 사람은 없나?”(Is anyone seeing this?) 내가 본 자막은 이랬다. “세상이 끝날 텐데.” 영화 자막 제작은 출판물 번역과는 달리 고려해야 될 사항이 많으며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례가 그런 경우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작가와 감독이 공들여 적었을 대사를 왜 시와 소설의 한 문장만큼이나 최선을 다해 옮겨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요지’가 아니라 ‘표현’이 전달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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