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은 일주일의 6일을 <최고다 이순신> 촬영에 할애하고 있었다. 가끔 보충 촬영이라도 잡히면 일주일 내내 신준호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조정석의 표정에서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사진 촬영과 인터뷰에 성심성의껏 응했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한 지 1년. 조정석의 행복했던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다.
납뜩이, 그 뒤 1년
2012년 3월22일 <건축학개론>이 개봉했으니, 딱 네 계절이 흘렀다. 사람들이 <건축학개론>을 보고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습작을 써내려갈 때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으로 자신의 배우 인생 제2막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간 일년. 그사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CF를 처음으로 찍어봤고, 작품이 연이어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오디션 보러 다니던 저였는데. 잊지 못할 한해였어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지난해 말엔 팬 분들을 위해 트위터에 글도 남겼어요. ‘당신들 덕에 구름 위를 걷고 무지개를 봅니다’라고. 진짜 그런 심정이었어요.”
사실 구름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었다. <건축학개론> 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랬고, 조정석은 여전히 바쁘게 자신의 몸을 놀렸다. <건축학개론> 개봉과 동시에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 방영이 시작됐다. <더킹 투하츠>가 끝나고 영화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에 합류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4월까지는 <관상>에 집중했다. 길고 길었던 <관상> 촬영이 끝나갈 즈음 KBS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을 만났다. 신 스틸러에서 주말 저녁 안방을 책임지는 배우로 성장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주말드라마로 통하다
<최고다 이순신>은 요즘 시청률 25%를 넘나들며 종합 시청률 상위권에 꾸준히 머무르고 있다. 인기에 연연하는 배우는 결코 아니지만 조정석은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다.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오래 서서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배우는 더 행복한 것 같아요. 연극의 3요소가 희곡, 배우, 관객이잖아요. 사람들이 조정석이라는 배우를 더 많이 알수록,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여지도 훨씬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최고다 이순신>은 배우 조정석의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TV에 나오는 아들이 자랑스러워 주말 저녁 8시면 TV 앞에 꼭 붙어 계신다는 어머니의 존재도 <최고다 이순신> 출연을 결정하는 데 한몫했다.
<최고다 이순신>에서 조정석은 기타치고 노래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세속적) 성공을 결심한 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가 된 신준호를 연기한다. 신준호는 자기 관심 밖의 여자들에겐 까칠하기 그지없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속말과 반대되는 얘기를 늘어놓는 게 특기다. 조정석은 신준호를 “가진 것이 많아서 보여줄 것도 많은 인물”이라고 했다. “가진 게 없으면 매력을 발산하기 힘든데, 신준호는 재료가 많은 인물이었어요.”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면 재료의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조정석은 원재료의 가치를 최대치로 끌어낼 줄 아는 활용력이 뛰어난 배우다. 그는 그 과정을 “캐릭터에 동화되려는 노력”이라고 표현했다. “그 인물로 연기한다는 생각보다 ‘나는 그 인물이다’라고 자기최면을 많이 걸어요.” 납뜩이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은시경(<더킹 투하츠>)으로, 황영민(<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으로, 신준호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니 조정석의 강력한 자기최면 덕분일 테다.
물론 최면에 쉽게 걸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맡은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뮤지컬 <첫사랑>을 할 때였다고 한다. 조정석은 바다에서 살고 바다에서 죽는 마도로스가 되길 꿈꾸는 인물을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대형 항공모함 조립 모형을 사서 그것을 조립하는 거였다. “바다에 대한 애정, 마도로스로서의 꿈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싶어서 무작정 시작했어요. 그런데 모형을 조립하다보니 흥미가 생기는 거예요. 큰 배를 타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그 인물로 살기 위해선 이런 ‘노력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흥(興)으로 흥하다
조정석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흥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조숙했을 것 같다고요? 완전 까불이였어요. 까불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일종의 연례행사였다. 중학생 땐 엘리트 친구들을 만나 잠시 공부의 맛을 느끼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가무에 빠진다. 고1 때는 친구들을 모아 댄스그룹을 만들었고, 교회 성가대에 들어가면서 연극을 접했다.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려다 삼수 끝에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하면서 조정석의 배우 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배우는 몸을 잘 써야 한다고, 자신의 몸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 때 신체훈련동아리에 들었어요. 거기서 앞구르기, 뒤구르기, 옆돌기, 점프, 사이드킥 같은 걸 진짜 진지하게 훈련했어요. (웃음) 그때부터 뮤지컬에 빠져들게 됐고요.”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일까. 조정석의 연기를 보면 동물적인, 본능적인 감각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게 다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거다. “멍청하진 않아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떤 역이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조정석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누구나 인정하는 노력형 배우이기 때문이다. “배우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면 세 시간은 거뜬히 연기 얘기해요. 그게 재밌어요.” ‘불알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늘 연기 얘기를 한다는 조정석. 그의 세계엔 연기와 무관한 일이 조금도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였다.
조정석의 관상
“<건축학개론> 시사 때 영화보고 재밌는 조연이 출현했구나 생각했어요. 관객의 호흡을 생각하면서 연기하더라고요. 자유자재로 긴장을 늦췄다가 또 순식간에 관객을 끌어당기더라고요. ‘누구지?’ 하고 나중에 찾아봤더니 뮤지컬 배우더군요. 그때 <관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경(송강호)의 처남 역할로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주고 미팅을 가졌는데 영화 속 이미지와 다르게 잘생겨서 놀랐어요. 좀 퉁퉁하고 무딘 느낌일 거라 생각했는데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하얗고. 세련되고 잘생겨서 팽헌 역에 캐스팅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어요.” <관상>의 한재림 감독이 회상하는 조정석과의 첫 만남이다. 조정석으로선 <관상>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이었다. 한재림 감독의 전작 <우아한 세계> <연애의 목적>을 자신의 베스트영화들로 꼽을 만큼 좋아하기도 했고, 함께 연기할 주연배우가 송강호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 무조건 해야 한다 싶었죠.”
<관상>에서 조정석이 연기한 인물은 조선시대 최고의 관상가 내경의 처남인 팽헌이다. 한재림 감독의 말에 따르면 팽헌은 “순수하고 철없는 캐릭터”다. 상세 설명을 덧붙이길 “어느 집에나 있을 것 같은 반백수 처남, 트레이닝복 입고 머리 안 감고 동네 만홧가게에 자주 들락거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인물이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는 다재다능한 친구”라며 한재림 감독이 극찬한 조정석이 과연 송강호와 어떤 연기의 합을 보여줄지 궁금증이 점점 부푼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난다면 지금의 조정석과 사귈 의향이 있나요? _김진현(페이스북)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면, 조정석이란 남자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낄 것 같아요. 정말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도 아니고 또 나쁜 사람도 아니고. 제가 여자라면, 같이 있으면 편한 사람한테 끌릴 것 같아요.
-촬영 외에 휴식 시간이 주어지면 주로 무엇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_SS(미투데이) =요즘에 다시 기타를 치고 있어요. 한때 열심히 쳤던 그 기타를 다시 매일매일 조금씩 치고 있는데 그 재미에 흠뻑 빠져 있어요. 작곡까지 하는 건 아니에요. 기타 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름대로 혼자 곡을 만들어보곤 해요. 그런데 남들한테 공개하지는 않고 혼자만 즐겨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