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뽑을 때 가장 난감한 꼭지를 꼽으라면 ‘tview’다. 뉴스와 스포츠 중계를 제외하곤 TV를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으니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으니 의견이 없다. 캐릭터를 숙지하고 있지 못해 줄거리를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필자들이 활용한 유행어를 한눈에 알아먹지 못해 애먹기도 한다. <씨네21> 기자들은 대부분 TV를 즐겨보는 편이다. 술자리에서도 따끈따끈한 신작 드라마와 인기몰이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촌평이 자주 오가는데 그때마다 잠자코 묵언수행에 돌입해야 한다. TV에 관한 한 까막눈이다.
넋 놓고 TV 보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고3 때였다. EBS 교육방송을 보는 척하다 부모님이 코 골면 채널을 재빨리 돌렸다. 감시를 피해 드라마를 보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는 일도 잦았다. TV에서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는 지청구를 물리치려고 갖은 수를 짜내기도 했다.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자율학습을 한다고 해놓고,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슈퍼마켓 좌판에서 TV 자율시청을 했다. <여명의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그해 겨울 대학 합격증을 받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재수생이 되었다고 TV 중독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학교 앞 슈퍼마켓은 학원 앞 닭도리탕 집으로, 음료수는 소주로, <여명의 눈동자>는 <질투>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나마 <질투>가 한여름에 방영되어 다행이었다. <질투>가 가을에 방영됐다면, 재수생은 삼수생이 됐을 것이다. 입시를 코앞에 두고 TV를 끊는 데 성공한 아들을 한동안 부모는 대견해했다. 그러나 얼마 뒤 대학 원서등록 때 방송사 드라마 PD가 되겠다며 난데없이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하겠다는 아들의 고집 앞에서 부모는 “TV 귀신이 씌었구먼”이라고 땅을 쳤다.
요상한 일이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TV 중독증은 TV 기피증으로 바뀌었다. 진로까지 바꿀 정도로 심각했던 TV 중독증은 입학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대학 4학년 때 중고 노트북을 산다고 집에 거짓말하고 돈을 받아 TV와 비디오 플레이어를 산 적이 있다. 영화 일을 해보겠다고 하루에 비디오를 3, 4편씩 몰아서 봤다. 그 광적인 집착의 유효기간도 불과 1년 남짓이었다. 유행병에 옮았던 것인가. 하릴없고 부질없다고 여긴 치기의 시간, 그런데 말이다. 요즘 들어 말이다. 그 열렬한 애정의 시간들이 무척 그립다.
☞ 이번호에 TV 관련 기사가 많다. 그래서 TV 이야기를 꺼냈으나 역시나 아는 것 없어 곁길로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