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았을 때의 은교가 잊히지 않는다.” 소설에서 노시인 이적요는 그렇게 첫 문장만 따로 떼어 썼다. 그 ‘순간’은 영화에서도 결정적이다. 이름 모를 소녀가 잠시 쉬어가는 새처럼 이적요의 흔들의자 위에서 새근새근 눈을 붙이고 있는 그 찰나. 그 찰나를 어떤 언어로 붙잡을 수 있을까. “인생에 돌아오지 않는 어떤 순간이 찍힌 것 같다.” 정지우 감독의 그 말의 애틋한 기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물한살 소녀 위로 가을 햇살과 나무 그림자가 덧없이 어른거렸다. 그 소녀의 한때를 놓칠세라 김태경 촬영감독도 카메라를 쉽사리 놓지 못했다고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게 만들어버리는 그 순백의 소녀를 2012년의 신인으로 꼽은 게 <씨네21>만이 아니었던 것도 당연하다.
2013년 봄, 스튜디오에 들어선 배우 김고은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우리는 얄궂게도 아직 이적요의 처녀를 바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땐 그냥 은교로 살았다”면, 요즘은 ‘복순이’로 살고 있다고 했다. 복순이는 황인호 감독의 신작 <몬스터>에서 그녀가 맡을 동갑내기 여주인공이다. 약간 모자란 구석도 있지만 욕도, 액션도 좀 하면서 자기 가족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민기)에 끝까지 맞서는, 언뜻 들어도 은교와 전혀 다른 채도의 인물이다. 그렇게 <은교> 뒤 1년 만에 서서히 다른 색의 옷을 입기 시작한 그녀와 그간의 시간을 되감아보았다.
<우리 읍내>란 계기
“자유로웠어요. 고정관념이 별로 없을 때니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을 마음 편안한 상태에서 했던 것 같아요. 공연하는 내내 날아다니는 기분이었고 끝나니까 슬프더라고요. 이걸 잡아야겠구나, 생각했죠. 어렸을 때 중국에서 억지로 무용을 배우면서 내가 해서 기쁜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았던 덕분이에요.”
‘나’에게 연기가 왜 좋은 것이 되었는가를 가식없이 단순한 단어들로 전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지우 감독의 표현대로 “단단했다”. 그 단단함은 그녀의 성장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가 틀어주는 영화를 보며 모국어를 배웠다는 그녀는 14살 때 한국으로 돌아온 뒤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계원예고에 입학했다. 외로움은 그녀의 힘이 되었다. 1학년 때의 첫 주연작에서는 낙담도 했지만 2학년 때 만난 <우리 읍내>라는 작품으로는 ‘유레카’를 외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들어간 것도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도 방황의 날들은 있었지만, 그녀는 계속 자신을 날아다니게 하는 연기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은교가 왔다.
첫 경험으로서의 <은교>
“뭐든 처음 할 때 가장 많이 느껴지잖아요. <은교>를 하면서 수많은 치실이 내 몸 안에 있어서 하나하나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마지막에 할아버지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이게 내 인생 같더라고요. 한번에 오케이가 났는데, 계속 눈물이 나서 모니터도 못했어요. <은교>가 연기에 더 간절해지게 해준 것 같아요.”
김태경 촬영감독의 카메라가 그녀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에 <영아>(최아름 감독)를 비롯해 영화과 친구들의 단편에 많이 출연했다. 하지만 상업영화의 현장만이 주는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연극 때 상대 배우와 그랬듯, 카메라나 스탭들의 시선에서 “낯섦을 빼려고 엉덩이로 이름도 써봤다”. 그렇게 긴장을 내려놓기 시작한 그녀는 자는 장면에서는 정말 잠에 빠질 정도로 자연스러워져 선배 박해일의 부러움을 사더니, 곧 자기만의 리듬마저 얻었다. 은교가 필통을 ‘달각달각’ 흔들 때 정지우 감독은 “내 마음도 흔들흔들거리는 것 같았”고, 은교가 담벼락의 계단을 ‘통통통’ 오르내릴 때면 박범신 작가는 “소설 속 은교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은교의 호흡을 열심히 느끼다보니 감정도 나오고 행동도 나왔다”는 그녀의 명쾌한 설명.
일상성의 배우
“은교에게는 일상적인 연기가 중요했어요. 베드신보다도 일상에서의 감정들을 명확히 이어줘야 했거든요. 은교도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고민도 비슷한데 다만 자라온 환경 때문에 어두운 면들도 있겠구나, 계속 생각했어요. <몬스터>에서는 다르겠지만 복순이에게도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면이 있어요.”
배우로서 그녀의 특별함은 ‘일상성’에 있다고 감독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대단히 일상적인 데가 있는데 마음을 움직이면 그 마음의 상태에 눈을 뗄 수 없었다.”(정지우 감독) “처음 본 고은이 사진이 교복 입고 휴대폰카메라로 그냥 성의없게 찍은 사진이었는데 평범하면서도 신선했다.” (김태경 촬영감독) “처음 만났는데 내 동생 같더라.”(황인호 감독) 세상에 일상적인 배우는 많겠지만, 그녀는 그 일상성을 다채롭게 추상화할 수 있는 육체를 지녔다는 점에서 남다른 데가 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은교>를 비워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채우려 종종 ‘여행’에 나선 곳도 일상의 한가운데였다. “여행이라고 꼭 멀리 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북촌 같은 곳이 좋아요. 골목골목을 누비기만 해도 속이 뻥 뚫려요.”
복순이가 왔구나
“복순이만의 호흡이 있어요. 얘가 살짝 모자라서 남들과 다른 감정을 가져가거든요. 아주 단순하게 다가가야만 진실할 것 같아요. 모자라다고 모자라게 보이려고 하면 안될 것 같고 그냥 복순이처럼 해야 할 것 같아요.”
“잘 가라, 은교야.” 이적요의 먹먹한 대사와 함께 은교를 떠내보낸 지 1년째. 전보다 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졌다”는 그녀에게 복순이가 왔다. 은교가 순백색이라면 복순이는 진한 핏빛일까. 황인호 감독은 “3년간 CF가 다 끊길 거라 농담할 만큼 강렬한 캐릭터인데도 두어달 지나니 말투나 멍한 눈빛이 다 스며들었더라”라고 했다. 그 복순이도 은교만큼 단단할 것 같다. “복순이의 호흡을 생각하다 보니 은교처럼 체화되는 게 있어요. 발음도 약간씩 무너지고. 엄마도 요즘에는 (복순이처럼) 좀 모자라 보인대요. (웃음)” 오세형 무술감독의 지도 아래 액션스쿨에서 생활밀착형 액션도 준비 중이란 그녀. 그렇게 그녀는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한 작품씩 해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를 우리도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지켜봐주면 될 것 같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몬스터>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_노성일(페이스북) =빨리 다른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그래서 <몬스터>를 읽었는데 한번에 끝까지 읽혔고, 내가 연기하는 복순이가 어떨까 많이 궁금했다.
-어려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_Dc Shin(페이스북) =내 경우에는 대본이랑도 ‘밀당’을 해야 한다는 것.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기보다 다른 것들을 보고 생각하다 다시 대본을 보면 새로워지는 게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