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다를까, 연례 행사처럼 거듭되던 스크린쿼터 흔들기가 올해도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가 상반기중에 한·미투자협정 체결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스크린쿼터도 줄일 것이라는 위기감이 부쩍 커진 것이다. 이에 대해 영화계에서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대규모 기자회견을 여는 한편 대표단을 통상교섭본부장에게 보내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항의하는 등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영화계의 발빠른 대응을 보면, 사람도 세상도 늘 변화·발전한다는 건 맞는 말인가보다. 스크린쿼터 축소 기도에 대한 영화인들의 대응논리가, 초국적 자본논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수준까지, 아주 멋지게 상향한 것이다. 그동안 스크린쿼터에 대한 영화계의 명분과 논리가 흘러온 걸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수년 전, 지극히 감성적으로 한국영화 ‘보호’를 읍소하던 주장에서 시작해, ‘수입대체 효과’가 큰 고부가가치 유망산업인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나아갔다. 그러더니 이제는 문화적 종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화적 당위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물결의 폭력성을 경계하는 정치경제학적 논리로 커졌고, 구체적으로는 한·미양자간투자협정(BIT) 체결 반대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었다. 누가 보더라도 밥그릇 걱정 때문에 이 난리 피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아주 분명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미투자협정의 부작용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 관련 문제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지금이야 미국 자본이 한국에 들어와도 한국의 규칙과 질서에 따라 장사를 하고 벌어도 한국에 떨어뜨리고 가야 하는 게 적지 않은 데 반해, 협정이 체결되면 미국이 장사하기 쉽게 규칙을 만들어주고 버는 것도 고스란히 미국이 되가져가게 된다. 협정의 기본이 되는 ‘내국민 대우’, ‘이행의무부과 금지’ 같은 조항이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최혜국 대우’란 것도 있어서 어떤 산업부문을 다른 나라에 개방하게 되면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밖에 없다. 한·미투자협정이 안고 있는 그늘이 이렇게 짙은데도 제동을 거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일부에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지만 대중적인 반대운동으로 확산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경제위기로 나라살림이 거덜날 것 분위기에서 한·미투자협정이 우리 경제를 되살리는 응급처방인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에선 이를 대놓고 반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은 다분히 밥그릇 지키기 수준에서 크게 못벗어났다. 그러니 ‘딴따라’들의 돌출 이벤트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는 투쟁의 산물이고, 사람은 투쟁을 통해 각성하고 발전한다는 좀 오래되고 딱딱한 명제가 박물관에만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영화인들은 어느새 초국적 자본의 힘을 앞세운 거대한 신자유주의 물결의 횡포에 온몸으로 맞서는 가장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