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현장에 선 기분은 어떤가. =너무 좋다. (웃음) 매일 준비할 게 많아 잠을 별로 못 자서 눈이 항상 충혈돼 있지만 감독에게 현장만큼 좋은 게 있겠나. 낯선 가운데 좋은 스탭들을 만난 것도 정말 행운이다. 이모개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왜 다들 최고라고 하는지 느꼈다. 자기가 딱 서 있는 곳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그 직관력이 뛰어나다. 문학적 소양이 밝아서인지 비주얼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높다. 요즘은 영상미를 지나치게 추구하면 감독이 잘리는 시대라(웃음) 그런 점에서도 큰 도움을 얻었다.
-<감기>를 맨 처음 시작할 때 잡은 연출의 원칙이라면. =사실상 이런 대규모 감염사태가 발생한다는 건 영화적 허구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거짓말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최대한 진짜처럼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재난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느낌을 담아내야 한다. 그래서 거의 핸드헬드로 가고 있고, 인물에 밀착해서 주관적 시점도 과감하게 담고 있다. 예전에는 컷을 정밀하게 짜서 콘티와 거의 90% 가깝게 촬영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장에서 일단 시나리오와 상황만 두고 리허설을 한다. 배우들이 그 공간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대사를 치면서, 입에 맞는 대사를 만들고, 촬영감독은 앵글이나 사이즈를 결정한다. 나 역시 거기에 맞춰 동선과 대사를 수정한다. 사실 처음에는 서툴러서 많이 헤맸는데 이후 잘 적응했다.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인물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 그것이 진짜 감정이 아닌가 싶다.
-재난영화의 재미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재난영화가 재미있는 순간은 인물들의 이기심이 촉발될 때다. 그게 바로 인간의 생존본능이고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경쟁력이다. 재난이 닥치면 그게 극도로 퍼진다. 동시에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엄청난 희생정신까지 감수하게 된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이기심과 극단적인 이타심이 충돌하는 게 바로 재난영화의 재미다. 별거 아닌 감기로 출발했다가 크나큰 역습을 당하고, 그로 인해 일상이 마구 뒤흔들려 위기로 치닫고, 그런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까발려진다. 재난영화로서 <감기>의 묘미도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것들이 생생하게 충돌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대리체험하는 재미가 있을 거다.
-좋아하는 재난영화는. =지금 좋아하는 재난영화들은 내 기억 속의 재난영화와 다르다. 10대 때 봤던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와 <타워링>(1974)은 대사나 음악까지 기억날 정도로 재미있게 봤던 영화들이고 재난영화의 정석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28일 후…>(2002)나 <우주전쟁>(2005) 같은 재난영화들이 좋더라.
예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 김성수 감독이 ‘이모게이터’라 부르는 이모개 촬영감독.
-여러모로 지난해의 <연가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연가시>는 재미있게 봤다. 재난영화의 공식이랄까, 사람들이 기대하는 내러티브의 유혹을 충실히 따르는 지점이 좋았다.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데, 그 환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다른 사람도 돕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감기>도 비슷한 장치를 적용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재난영화의 흥행공식이기도 하다. <연가시>의 ‘찌질한’ 아버지 재혁(김명민)이 영웅이 되는 과정을, 흥미로운 상업영화로 나아가기 위한 장치로 잘 쓴 것 같다. 나도 그런 공식을 잘해내야 하는데. (웃음)
-보다 큰 규모의 영화인 만큼 스펙터클한 볼거리에 대한 배려도 있을 것 같다. =그건 당연하다. 재난영화가 관객을 설득시키기 힘들면서도 또한 파급력을 발휘하는 건 바로 그 재난의 양상과 규모다. ‘만약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며 그 재난이 닥쳐오는 느낌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재난영화에 첫 번째로 점수를 주는 지점이 바로 그런 곳이지 않을까. <감기>는 감염된 도시 전체를 ‘블록’시키는 이야기라 학교 하나에 사람들을 몰아넣는다고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다. 바로 그 공간적 운용에서 스펙터클이 드러날 것 같다. 또한 구제역 사태 때 돼지들을 대량으로 살처분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한두 마리만 감염됐겠지만 수백 마리를 한꺼번에 죽인다. 그래야 살아남은 우리가 안심하기 때문이다. <감기>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이제 사람들도 그러한 위협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게 진짜 공포다.
-<감기>는 재난영화 안에 추격 액션극의 요소가 있다. 그런 데서 당신의 이전 영화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재난영화를 보면 우리의 시선이나 마음보다 더 빨리 재난이 일어나고 달려간다. 그걸 추격해서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어쨌건 그 재난에서 달아나야 하니까 기를 쓰고 쫓고 쫓는다. 그런 시퀀스들은 명백하게 액션영화 시퀀스들을 차용해서 찍는 것과 효과가 같으니까, 확실히 촬영할 때 즐겁긴 하다. (웃음) 어쩔 수 없는 내 ‘피’가 그런 것 아닐까. <영어완전정복> 때도 경찰들이 학원에 들이닥치는 장면에서, 사실 별거 아닌 장면인데도 괜히 힘줘서 찍었던 기억이 난다.
-수애와 장혁에 대해 얘기해준다면. =그 어떤 상황이나 캐릭터라도 수애가 연기하면 뭔가 실제상황 같은 느낌이 있다. 의사 가운도 무척 잘 어울리고 이번 영화에 참 잘 맞는 느낌이다. 구조대원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장혁이 떠올랐다. 내가 오래전부터 장혁을 알아왔는데 그는 이 영화 속 지구의 모습과 싱크로율이 90% 이상이다. 정의롭다기보다 그저 주변에 누구 다친 사람, 안 좋은 사람 있으면 성격적으로 그냥 못 지나치는 인간이다. 착한데 잘생기기까지 한 동네 형? (웃음) 게다가 저렇게 몸 사리지 않고 촬영하는 배우는 처음 봤다. 대역 없이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최대한 자제시키고 있다. 오래도록 액션영화를 찍었지만 촬영하다 다치는 것만큼 허무한 게 없다. 내가 뭣하러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무조건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미르로 나오는 민하는 거의 천재 소녀다. 자기 분량에 대한 욕심도 많고. (웃음) 보통 아역들을 이해시키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민하는 상황을 납득하는 순간 바로 ‘오소독스’한 연기를 보여준다. (웃음)
-예전의 혈기왕성한 김성수 감독이 얌전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웃음) =크랭크인 전날은 예나 지금이나 잠이 안 오더라. (웃음) 중요한 촬영이 있는 전날도 잠이 안 온다. 자려고 누웠다가 정리가 안된 부분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서는 다시 들여다본다. 현장에서도 감이 안 올 때가 있다. 배우가 ‘여기서 이렇게 해요? 아니면 저렇게 해요?’라고 물을 때 갑자기 나도 잘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일일이 챙겨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건 오래 쉬어서가 아니라,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나마 요즘은 예전에 비해 굉장히 전문화된 현장이라 나로서는 예전처럼 소리 지를 일도 진짜 없다. (웃음)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다들 늘 뭔가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해, 저렇게 해, 그러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스탭들이 먼저 다가와서 ‘제가 해드릴게요’라고 한다. (웃음)
-10년 만의 영화 현장,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 ‘내 영화’라는 실감이 왔나. =내가 오래도록 쉬었고 이전과 다른 스타일과 방법론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 그래도 감독은 감독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배우나 스탭들은 감독 하나 바라보고 있고, 내가 매 순간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주시하고 있다. 옛날처럼 적극적으로 현장에서 나대지 않아도 내가 현장의 중심이라는 건 변함없다. 감독이 행복한 것은 그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런 책무를 떠안은 데서 오는 스릴이 있어서다. 나로서는 바로 그 오묘한 스릴을 다시 맛보는 게 좋은 거다. 게다가 예전에는 70~80명 정도의 스탭들이 움직였는데, 이제는 특수효과나 CG 등 현장 스탭들이 더 늘어서 거의 100~120명의 스탭들이 움직인다. 바로 내가 시작한 영화이고 그들이 나를 따라온다.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도망갈 곳은 그 어디도 없다. 어느 순간 불쑥불쑥 ‘내가 왜 <감기>를 시작했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영화는 재미있다. 여전히 잘 못해서 문제지, 확실히 재미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