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봄꽃들이 까르륵대며 올라오는 중이다. 이맘때면 꽃을 사랑한 화가들이 떠오른다. 꽃을 사랑한 화가들은 꽃이 사랑한 화가들이기도 하다. 봄볕 속에 나른하고 비스듬히 앉은 채 뒤적거리게 되는 화집은 주로 조지아 오키프. 생명력 가득한 우아함과 힘, 관능적인 해방감, 건강한 욕망과 자유. 그녀가 그린 꽃들은 하나씩의 생생한 우주로 존재한다. 개화와 낙화로 대변되는 생로병사의 일반론에 파묻히지 않고 저마다의 고유한 에너지 파동으로 퍼덕거린다. 조지아 오키프는 자연의 존재방식이 인간의 모든 예술창조 행위의 근원임을 증명하는 탁월한 예술가 중 하나다. 꽃, 조개껍질, 돌멩이, 나뭇조각 등에서 그녀가 발견해내는 새로운 우주는 한없이 매혹적이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그녀가 말해온 것처럼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봄의 꽃 폭풍 속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꽃들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감사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봄이면 어쩔 수 없이 레이첼 카슨의 저 유명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 눈앞의 생동하는 꽃들과 겹쳐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 의해 서서히 혹은 급격히 죽어가는 지구별의 자연…. 이렇게 지구를 착취, 오염시키며 살다가는 결국 ‘침묵하는 봄’이 조만간 오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에 저지르고 있는 무수한 죄악들 중 가장 광범위하며 복구 불가능한 파괴를 일으키는 것은 방사능 오염일 것이다.
베란다 화분에 수선화 두 송이가 곱게 피어난 어제는 에마뉘엘 르파주의 만화책 <체르노빌의 봄>을 읽다가 울고 말았다. 20세기에 자행된 가장 큰 죄악으로 꼽히는 아우슈비츠와 체르노빌. 수려한 작가주의 그림 속에 아프게 아로새겨져 있는 체르노빌 참사의 현장은 너무도 자주 고통스러운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남편을 포옹하는 것은 금지였다. 만질 수도 없었다…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염성 높은 방사능 물질이에요.” “4월에 내리는 포근한 비… 빗방울이 마치 수은처럼 흘러내린다.” 이런 고통스러운 대사들이 두렵고 아름다운 영상시처럼 펼쳐지는 책을 조지아 오키프의 화집 위에 겹쳐놓는 봄날이 새삼 아팠다.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선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그림들이 단연 두드러져서 전달하고자 하는 비극적 메시지가 더욱 아픈지도 모르겠다.
조그만 땅덩어리에 무려 23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인 지금 여기 한국은 어떠한가. 피폭당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떠오르며 눈물이 흐르는 순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말 안전한가. 안전하다는 것은 대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