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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책 선물하기
금태섭(변호사) 2013-04-18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 민음사 펴냄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고등학생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날아온 메시지.

“변호사님! ㅎㅎ 뭐 하나 여쭙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생일 때 선물할 만한 소설책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조금만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

하,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녀석. 내가 해봐서 아는데, 18살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 생일에 책 선물 같은 거나 하고 있다가는 덕후 소리 듣고 차이기 십상이란다. 하지만 의뢰인의 질문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변호사의 본분. 즉답을 보낸다.

“고등학생이군요.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권해드립니다.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나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선물하기 좋습니다. 여자 친구 생일 즐겁게 지내세요.^^” 질문을 한 학생처럼 나도 어린 시절 어떻게 좀 잘되기를 바라면서 교회누나와 책을 주고받던 기억이 있다. 책을 선물할 때는 누구나 어떤 의미가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될까. 작가들은 자신의 책에 독자가 읽어내기를 바라는 특정한 메시지를 담아두는 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75살로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아서 화제가 된 구로다 나쓰코씨. 수십년간 한 작품도 발표하지 않으면서도 글쓰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은 그녀는 수상작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메시지는 전혀 없다. 무언가를 전하려면 논문을 쓰면 된다. 작품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존재물을 ‘쇼쿠닌’(職人•장인)처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본다.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보다 효율적인 전달 수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이나 음악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독립된 작품에 내포돼 있는 것을 (독자가) 알아서 가져가면 된다.”

자,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권하고 선물하는 걸까. 좋은 책에는 독자의 발견을 기다리는 어떤 순간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우주의 한 속성이든 혹은 알고는 있지만 정확히 표현해낼 수 없었던 삶의 어떤 지점이든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의 즐거움이야말로 책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책을 통한 발견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하는 고등학생의 마음으로 이 칼럼을 시작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 포크너의 <소리와 음향>에서 찾아낸 순간들을 전해주고 싶다. 물론 그 친구에게는, 여자친구 생일에는 책과 함께 조그만 반지라도 같이 선물하라는, 어린 시절 뼈아픈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