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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곡하는 밤
이다혜 2013-04-11

<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 창비 펴냄

한밤중이면 근처 오름의 숲에서 컹컹거리고 짖는 노루 소리가 몇 안되는 가로등보다 밝은 달빛 사이로 들리던 집에 신세를 지던 때, 4.3으로 인해 온 마을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일의 참담함에 대해 들은 일이 있다.

현기영의 단편 <순이삼촌>에는 바로 그런 제사 지내는 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위(位)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이 회상을 통해 풀려나온다.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를 본 사람이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으나, 제주도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을 남녀 구별 없이 흔히 삼촌이라 불러 가까이 지내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살던 ‘나’는 오랜만에 향한 고향에서 순이삼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전해듣는다. 순이삼촌은 두달 전까지만 해도 ‘나’의 집에서 건강한 몸으로 살림을 돕다 내려가지 않았던가.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평생을 일구던 밭에서의 일이었다. 꿩약을 먹고 자진한 것이었다. 그리고 회상은 삼십여년 전으로 향한다. 한 마을 사람 수백명이 총부리에 몰려 차례로 총살당하던 날 순이삼촌의 두 아이도 목숨을 달리했다. 뿐만 아니라 순이삼촌이 어렵사리 집에 돌아오니 밭은 온통 그렇게 끌려가 죽은 사람의 시체밭이 되어 있었다. 까마귀가 시체를 파먹고 개가 시체 팔다리를 물고 다니는 광경이 연출되고, 흙에서는 솎아내고 또 솎아내도 흰 잔뼈와 녹슨 납탄환이 나왔다. 송장거름을 먹은 흙에서는 그해 유달리 알이 굵은 고구마가 났다. 그 고구마밭의 한켠에는 그날 세상을 떠난 아들딸의 봉분이 있었고, 그 난리통에도 살아남은 뱃속의 아이는 튼튼하게 자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그날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었다.

1978년에 쓰인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영화 <지슬>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또 하나의 텍스트이자 단독적으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아름답다는 말이 거칠게 들린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문학이 역사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음을 긍정하게 되니 다른 표현을 찾을 도리가 없다.

ps. 어휘 자체가 다른 경우가 아니라면 <순이삼촌>은 제주말의 어미가 다른 것들을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 실었다. 곱씹을 수 있는 글과 달리 흘러버리는 말의 경우 억양과 어미의 차이 때문에라도 알던 말마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영화 <지슬>은 자막이라는 고육지책을 쓴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