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왓슨은 에마 왓슨이다. 당연한 소리. 다르게 말해보자. 에마 왓슨은 헤르미온느가 될 수 있어도 헤르미온느는 에마 왓슨이 될 수 없다. 금세기 최고의 프랜차이즈 인기 캐릭터도 그녀의 존재감을 넘어서진 못했다. 파파라치를 몰고 다니는 패셔니스타이자 주목받는 할리우드 청춘 스타는 이제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졸업하고 배우로 도약 중이다. ‘아름다운’이란 수식어 뒤에 가린 그녀의 총명한 눈빛을 마주할 준비를 하라.

신은 불공평하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면 에마 왓슨을 한번 보라. 그녀는 아름답다. 훈훈하게 자라준 대표적인 아역배우 출신 여배우로, 2011년에는 (비록 조사기관의 권위와 신빙성을 그리 높이 쳐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한 영화전문 사이트에서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 1위’에 뽑히기도 했다. 그녀는 인기가 많다. 빼어난 미모로 화장품 모델과 잡지화보 속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건 물론이고 각종 설문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하며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시선 한가운데서 산다. 그녀는 부유하다. 할리우드에서 수입이 가장 많은 아역배우 중 한명이었고 성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집안도 좋다. 할아버지는 영국 대법관 출신의 귀족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케임브리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다. 아버지는 정치학과 교수이고 어머니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는 변호사 100인 중 한명이다. 그녀 역시 똑똑하다. 영국의 명문 초중등학교 드래곤 스쿨과 명문고등학교 헤딩턴 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케임브리지, 예일대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9개 대학에 모두 합격한 뒤 결국 본인의 희망에 따라 브라운대학에 진학했다(심지어 그녀의 동생도 잘생겼다!). 그렇게 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헤르미온느보다 에마 왓슨

무엇보다 그녀는 ‘헤르미온느’였다. 2000년대 가장 흥행한 프랜차이즈 영화 속 여주인공으로 무려 10년의 세월을 살아온 것만으로 그녀는 이미 선택된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그 역할은 에마 왓슨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원작자 조앤 K. 롤링이 그녀를 보자마자 “바로 저 아이야!”라고 외쳤다는 일화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헤르미온느는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에마 왓슨 본인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적어도 헤르미온느로 있는 동안만은 에마 왓슨도 특별히 연기자로서의 자의식 운운하며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에마 왓슨이 헤르미온느였고 헤르미온느가 곧 에마 왓슨인 대체 불가능한 배역이었다. 그것이 축복이자 저주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나머지 두 배우인 대니얼 래드클리프와 루퍼트 그린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로 함께 자란 세 배우에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임과 동시에 언젠가는 벗어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이 위대한 캐릭터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졌던 것인 만큼 배우로서 자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존재였던 셈이다. 어제까지의 든든한 우군이 최악의 적이 되는 상황, 게다가 그 적은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라 21세기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다. 아역 연기자라면 모두 한번은 겪는 한 사람의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지만 그들의 경우엔 그 그림자가 좀더 짙고 특별했기에 그 고통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니얼 래드클리프나 루퍼트 그린트 모두 연기자로서 적지 않은 성장통과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에마 왓슨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진작부터 헤르미온느가 아닌 에마 왓슨으로 스크린 바깥에 서 있었다.

수많은 <해리 포터>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알지 못하는 이들마저 에마 왓슨을 모를 순 없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반부터, 그러니까 그녀가 여인의 향기를 풍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는 이미 캐릭터 스타가 아니라 일반적인 할리우드 스타의 조건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대놓고 말해 더벅머리 모범생 헤르미온느에 갇혀 있기엔 에마 왓슨의 미모는 날이 갈수록 광채를 더해갔다. 착하고 똑똑하지만 어딘지 답답하고 꾸밀 줄 몰랐던 조앤 K. 롤링의 헤르미온느는 어느새 에마 왓슨의 세련된 헤르미온느로 변해 있었다. 오죽하면 <해리 포터> 제작진들이 그녀가 시리즈를 하차한다고 선언할까봐 전전긍긍했을까. 물론 그녀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 하지만 똘똘하고 영민한 소녀에게서 새어나오기 시작한 여인의 향기를 막을 길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파파라치들의 맹렬한 추격이 이어졌고 그렇게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또 한명의 스타가 탄생했다.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줄 아는 배우

2011년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을 끝으로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졸업하면서 에마 왓슨도 배우의 길을 걸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말했다시피 그녀는 타고난 감각과 미모로 스크린 밖에서 더 주목을 받는 스타였다. 그러나 그것은 헤르미온느 역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었으며 연기자로서의 행보는 아직 가늠할 수도 없고 검증된 적도 없었다. 헤르미온느라는 캐릭터와 함께 성장해온 만큼 초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은 그녀에게 자신의 미모와 영광에 휘둘리지 않을 지성도 함께 주셨다.

<해리 포터>가 끝나갈 무렵에는 방황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배우가 적성에 맞는 직업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내게는 게리 올드먼이나 매기 스미스 등이 갖춘 재능이 없다. 평생 연기를 할 생각도 없다”고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스타의 후광에 휘둘려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조급증과 욕심으로 자신을 갉아먹지도 않았다. 충분히 고민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본 뒤 차분히 이어나간 다음 행보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에서의 조연이었다. 순박한 처녀로 나온 작은 역할이었지만 이 선택만으로도 배우 에마 왓슨을 향한 불안감은 어느 정도 종식되었다. 물론 그녀가 특별히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것도 빼어난 재능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첫 차기작이 조연이라고 실망한 팬들도 적지 않았고 출연시간도 10분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명성이나 자리가 아니라 역할을 중심으로 작품을 선택한 그 차분한 걸음걸이만으로도 배우로서의 그녀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기대하고 싶어졌다.

고민하는 청춘, 현명한 눈빛

그런 의미에서 <월플라워>는 또 한번, 지금의 에마 왓슨을 위해 마련된 최적의 역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헤르미온느 때처럼 특별히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혹은 그렇다고 느낄 만큼 딱 맞는 배역이다). 방황하는 청춘들의 성장담을 담아낸 영화 속의 샘은 에마 왓슨 그 자체다. 딱 지금 그녀의 나이에 할 법한 방황과 고민, 그리고 성장. 에마 왓슨이 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 캐릭터는 충실해진다. “난 사람들이 진짜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어”라는 영화 속 샘의 대사처럼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서 억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역할 속으로 들어가는 것. 스크린 바깥에서 자신의 크기와 위치를 확실히 인지한 넓은 시야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다. 특별할 것 없는 성장영화에 특별함을 더한 그녀는 이미 당당히 두발로 선 성인배우다.

에마 왓슨은 무수한 상을 받았다. 2002년 영 아티스트 어워드 최우수 신인여배우상부터 2012년 제21회 MTV영화제 최고의 영웅상, 최근 2013 피플스 초이스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틱한 여배우까지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젊은 차세대 스타’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바꿔 말해 배우 에마 왓슨은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상태다. 우리는 대개 이런 경우 스타라는 짐에 짓눌려 자멸하는 젊은 배우들은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에마 왓슨에 대해서는 당분간 안심해도 좋을 것 같다. 통과의례처럼 자화상을 비춘 <월플라워>를 시작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10대 소녀 강도단의 이야기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더 블링 링>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고,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대규모 프로젝트 <노아>에 캐스팅되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필요한 옷을 걸칠 줄 아는 현명한 ‘배우’ 에마 왓슨의 다음 행보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