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 같은 반 남자애를 길에서 만나 잘생겼다고 했더니 그 엄마가 “어휴, 공부를 잘해야지요” 한다. 아놔. 초등 1학년이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어. 꼬박꼬박 학교만 왔다갔다하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얼굴 뜯어먹고 살아도 될 만큼 잘생긴 그 아이는 영어유치원에 다닌 지난 2년 새 좀 삭아 보였다.
한 동네에서 줄곧 애를 키우며 살다보니 주변 아이들의 성장기가 보인다. 대체로 환한 표정은 ‘스케줄’에 찌들지 않은 아이들이다. 이제 막 전조작기에서 구체적 조작기로 들어선 이 나이대 아이들에게는 ‘학습’이 아니라 그저 스케줄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뿐 추상적으로 발전시킬 수가 없다. 혹시 그래 보여도 그럴 리가 없다. 한마디로 이제 막 천지분간이 되는 나이이다. 키가 크고 몸이 자라고 힘이 세지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충만해야 할 인생의 환한 봄날에, 무슨 북한강에 공구리 치는 소리세요.
<하루 3시간 엄마 냄새>를 쓴 임상심리전문가 이현수씨는 “언젠가부터 엄마들이 자신의 업을 자식에게 푸는 ‘업마’(業魔)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무시무시한 비유이지만 공감이 간다. 커가는 아이들은 때에 맞춰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이 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이른 시기부터 과부하한 학습은 아이들도 세상도 망친다. 앞서 이씨의 책에는 의미심장한 연구가 소개된다. 미국 버지니아대학 연구진이 인위적인 자극을 주면 감각이 발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수백개의 메추리알 중 일부에 갑작스레 빛을 쬐었다. 부화도 하기 전에 빛을 쬔 메추라기들은 알에서 깬 뒤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미 새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 것이다. 시각 발달만 지나치게 빨리 요구된 바람에 어미 새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머리에 새기는 각인 능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다.
열여섯살짜리가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이상 못 버티겠어요”라는 놀라운 은유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일주일 뒤에는 성실히 학교에 다니던 서울 대치동의 고3 학생이 투신했다. 유서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무거운 시는 아이들의 침묵일지 모른다.
(국민연금에 기대야 할) 내 미래도 지켜줄 동량들아, 부디 심장을 잘 건사해다오. 그저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