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이 개편호부터 들어갈 짧은 에세이를 보내왔다. 며칠 전 디자인 작업을 위해 전화로 몇 가지를 물었는데,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기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이미 써둔 원고가 있으니 참고하라며 일종의 샘플 글을 내주었다. 메일에 달린 첨부파일을 열면서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이었다. 기대가 큰 만큼 불안도 컸다. 다른 동료들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성사시킨 청탁인지라 적잖이 부담도 됐다.
그날 밤 그에게 메일을 써야 했다. 메일을 쓰면서 그렇게 진땀 흘리긴 처음이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애초 지면의 성격과 글의 방향을 분명하게 요구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자책에 한번 발목이 잡히자 글을 수정해달라는 간단한 메일을 보내는 일이 인쇄 사고 내고 시말서라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일을 발송하는 데 적어도 2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이튿날 오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욕심과 게으름이 빚어낸 무례에 대해 다시 사과했다. 통화 초반에는 나도, 그도 말을 돌려가며 합의점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화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자꾸 원점으로 돌아갔고, 그의 완강한 고집을 확인할수록 나 역시 뻣뻣해졌다. 누구도 흥분하지 않았으나, 심각한 대치 상황이었다.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긴 통화는 끝이 났다. 그는 통화 말미에 첫 타석에서 나가떨어졌는데 기분이 유쾌할 리 있겠느냐는 서운함을 내비쳤다. 2년 전 병상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읽으며 힘을 얻었고, 그때의 포만감을 <씨네21> 독자들과 어떻게든 나누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다음번 그와의 전투 때는 처음부터 강력하게 선전포고, 아니 구애하려고 한다.
봄기운 먹고 힘내라고 한 독자가 노오란 라넌큘러스 화분을 <씨네21>에 보내왔다. 지난 1년 동안 <씨네21>에 영양분을 제공해준 진중권, 김중혁, 김경, 전계수, 이용철, 김종철, 올드독, 원동연, 조성규, 이민희, 김학선, 최민우, 이기원, 정원교, 황정하, 이한나, 이선용씨와 함께 나누고 싶다. 영영 이별이 아니라 안식 휴가다. 그러니 독자들도 너무 아쉬워 마시라.